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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장소에 놓인 미술을 공공미술이라 한다. 수준 높은 공공미술은 시대의 번역이자 정체성을 반영하는 기호이면서, 인간 감성을 환기시키는 심리 환경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공공미술을 일컬어 ‘공공재’라고도 부른다. 대가 없이 불특정 다수가 공동으로 마음껏 향유할 수 있고, 사회 구성원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공공미술을 공공재라고 하면서 적지 않은 작품의 제작·설치 비용을 민간이 떠안는다. 정부지원금은 없다. 도리어 거리를 오가는 다중의 선호를 고려해야 하고, 적절한지 여부를 다루는 지자체 심의까지 거쳐야 한다. 내 땅에 내 돈으로 세우는 것임에도 그렇다.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건축물 준공검사도 받기 힘들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해야 한다. 1만㎡ 이상 건축물을 신축 및 증축할 경우 건축비용의 1% 이하를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하도록 한 건축물미술작품제도 탓이다.

 

고단한 삶과 현실, 노동의 고귀함을 담은 조너선 브로프스키의 ‘해머링 맨’(2002·광화문 흥국생명 빌딩)은 대표적 거리 미술작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건축물 미술작품은 도시 흉물이라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홍경한

 

본질은 사유재인데 공공재라는 무게를 강요하는 이 희한한 제도는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당시 권장사항으로 출발해, 1995년 의무화됐다. 그 배경에는 작가들의 생존권 보장 및 일자리 창출을 통한 민생고 해결, 기업이익의 사회 환원과 도시환경 개선이라는 구실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하지만 명분과 달리 이 제도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연간 1000억원대로 시장이 커지자 거간꾼들이 끼어들었고, 공공미술은 공공조형물 ‘사업’으로 둔갑했다. 소수의 전문 업체와 작가들이 설치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재산 활용의 제약에 건축주들의 불만도 쌓였다. 이는 이면계약, 꺾기 등의 편법과 심사위원 로비, 매수, 청탁과 같은 위법으로 이어졌다. 작품별 1억~2억원이 넘는 게 지천이지만 정작 작가들의 형편 역시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상 하청업자로 전락했다. 이리저리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손에 쥘 몫은 거의 없다. 생존권 보장은커녕 불량 조형물 생산에 일조한다는 오해만 샀다.

 

실제로 지난 20여년간 설치된 1만8000여점의 건축물 미술작품 대부분은 미학적 가치를 따지기 어렵다. 세계적인 거장 데니스 오펜하임의 유작 ‘꽃의 내부’를 무단 철거한 뒤 고물상에 팔아넘긴 부산 해운대구 사건처럼 사후 관리에 대한 인식도 엉망이기 일쑤다.

 

이쯤에 되묻게 되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건축물미술작품제도가 오늘날 과연 필요한가이다. 앞에서 벌고 뒤로 밑지더라도 당장은 먹고살아야겠기에 어쩔 수 없이 재료비도 안되는 예산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작가들, 매일 시각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시민들, 내 재산 내 마음대로 못하는 건축주 등 어느 면에서든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업체와 브로커들의 배만 불리는 이 제도는 시효를 다했다. 도시 흉물 양산의 원인인 이 낡은 제도를 이제 폐지할 때가 됐다. 그럼에도 공공미술의 필요성을 느낀다면, 국가 예산으로 문화소외지역 등에 설치하고 기관 공모로 작가를 선정하는 것이 옳다. 조세부담에 대한 국민 동의 아래 장소와 규모를 결정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공재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Posted by Kh-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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