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틀어 예술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은 없다. 오히려 당대 권력자를 비롯해 부유한 상인들, 그림을 주문했던 역대 숱한 이들의 품 안에서 안위했다.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들 또한 그 대가를 취하며 창작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자본에 종속된 예술가로 해석하는 건 무리이다. 그들 곁에는 구스타브 카유보트나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 페기 구겐하임 같은 후원자들이 포진해 있었으며, 이 안목 높은 예술 우군들은 브뤼야스가 쿠르베에게 그러했듯 ‘예술가는 존경받을 만한 권리를 지녔다’고 봤다.
데미안 허스트의 ‘Aspect of Katie Ishtar ¥o-landi’, 베니스 푼타 델라 도가나, 2017. 영국 작가 데미안 허스트는 자본과 예술의 관계방식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동시대 미술작가 중 한 명이다. ⓒ홍경한
작가들도 자본의 과잉 간섭, 자본으로 인한 예술의 자율성 침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현명하게 이해했다. 쾌감의 대상이자 우리를 더럽히는 배설물일 수 있다는 점에서 똥과 돈을 등치시킨 피에로 만초니처럼 자본과 예술의 관계방식을 알고 있었고, 자산의 예술전용에 내재된 문화정신의 존중과 예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균형’을 추구했다.
하지만 균형이 보편적인 건 아니다. 사실상 적지 않은 수의 예술가들은 예술에 대한 자본의 과도한 참견과 통상적인 경제기준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예술이 어째서 예술일 수 있는지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며, 어설픈 시장중심 정책에도 대립하지 않는다. 새로운 모더니티 창출에 관한 고민은 당연히 없거나 적다.
대신 자신의 예술이 대중에게 얼마나 매력적인지에 보다 관심을 기울인다. 취향에 간택 받기를 원하고, 시장 선택체계에 비굴할 정도로 읍소한다. 그러다 보니 적어도 한국 미술계에서 예술이 지닌 ‘섹시함’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자주성, 독자성은 화석화된 지 오래다.
문제는 예술가들이 예술의 가치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채 자본에 기생하도록 구조화하는데 앞장서는 곳이 다름 아닌 정부라는 데 있다. 실제로 정부는 예술경영지원센터 같은 산하기관을 통해 작가들에게까지 시장 좌판 깔 듯 장사하라며 부추기고 있다. 판로개척이라는 미명 아래 유통질서마저 교란하는 이 한심한 정책을 수년째 지속 중이다.
여기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발표해온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은 ‘미술시장진흥 계획’의 오판이기 일쑤다. 최근 공개된 ‘예비 전속작가제 지원사업’처럼 뭔가 그럴듯한 정책도 결국 알량한 돈 몇 푼으로 때우겠다는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근본적인 체질 변화와 예술에 관한 의식 개선과는 거리가 있다.
예술은 자본의 품 안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예술은 일반 경제적 기준만으론 평가될 수 없는 상징재화이며, 상징재화의 의미는 문화예술의 자율성 내에서 완성된다. 특히 문화예술의 자율성은 통상의 경제적 잣대에 대립할수록 가치를 획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 역시 균형이다. 즉, 예술의 독립성과 작가적 신념을 침해하는 자본권력에 대한 경계와 자본을 통한 예술의 가치 확보라는 분동의 무게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그 균형을 잡아주는 것에 있다. 지금처럼 ‘아티스트피’를 준다면서 소고기마냥 작가 등급을 매기고, 철학 없이 뭐든 돈으로 때우려는 습성은 예술과 똥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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