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연작. 2020. ⓒ김지연
영산강을 찍으러 가다가 광주 동하에 들렀더니 ‘만귀정’이라는 조선시대 정자가 보인다. 중학교 때 친구가 살던 동네이기도 했는데 자주 놀러가면서도 이 정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다녔다. 정자는 나와는 관계없는 한량들이나 놀던 곳으로 알았다. 우연히 들렀지만 이제 보니 경치도 좋고 정자도 수려했다. 공사 중인지 연못에 물이 없어 운치를 더하지는 않았는데 정자의 기초석이 훤칠하게 높아 디딤돌을 딛고서야 난간에 걸터앉을 수 있었다.
디딤돌은 차돌처럼 야무지고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돌았다.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 이 자리에서 ‘아무개’들의 발디딤 노릇을 했으리라. 원래부터 야무진 놈을 가져다 놓았겠지만 누군가의 발에 다지고 다져진 몸매일 것이다. 마당을 건너 토방이 있고 토방 위에는 디딤돌이 놓이는 것이 한옥의 전형일 것이다. 디딤돌 위에는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어 가족의 출타 여부를 알리기도 했다. 이제는 서양식 주택과 아파트 생활에 밀려 한옥 마당의 디딤돌은 사라지고 없다.
하기야 모두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이니 누구를 위해서 발디딤이 되려고 하겠는가. 그러나 누군가가 자기를 딛고 올라선다는 것이 꺼려져야만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밝히는 좋은 사람들이 있고 스스로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사회가 이만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자취를 알 수 없는 옛 친구 집을 훑어보다가 정자 아래서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디딤돌이 눈에 들어왔다.
<김지연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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