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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밀착

사진에서 밀착은 확대기를 쓰지 않고, 인화지 위에 필름을 그대로 얹어 얻어낸 프린트를 말한다. 아날로그 시대에 36컷짜리 필름 한 통을 한 장의 프린트로 보기 위해 주로 사용했다. 모니터가 달려있지 않은 필름 카메라의 특성상 밀착은 촬영한 결과물을 처음 육안으로 확인하는 떨리는 순간을 선물했다. 비용과 시간 절감을 위해서도 밀착은 필수였는데, 사진가가 하루에 36컷짜리 필름 10통씩을 찍으며 한 달 동안 여행을 했을 경우 모든 사진을 제대로 인화해서 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쿠바, 1963년 ⓒRene Burri / Magnum Photos


그러므로 밀착은 초점과 노출은 적당했는지 등의 기본적인 상태 점검에서부터 과연 어떤 사진을 골라 남들 앞에 내놓을지를 결정하는 사진 선정의 필수 단계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다수의 대표작들은 그 전후에 찍힌 수많은 사진들을 밀춰내고, 밀착 속에서 운명적으로 살아남은 사진이기도 하다. 이 말은 밀착 속에는 아직 꽃으로 피어나지 못한 보석 같은 사진들이 눈썰미 있는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미사진미술관의 ‘매그넘 콘택트 시트’전은 매그넘 사진가들의 밀착을 통해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사진의 탄생 배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대가의 밀착이라 해서 온전한 사진들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밀착 속에는 피사체와 사진가의 관계나 촬영 당시의 동선처럼 한 장의 사진이 담을 수 없는 서사, 한 장의 사진 이면의 진실까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르네 베리가 시가를 물지 않은 게바라의 사진을 골랐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게바라는 좀 더 다른 모습이었을까. 밀착은 ‘그날’의 속살을 여과없이 들춰낸다.



송수정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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