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곤잘레스 토레, 무제, 1992년
미술관 한구석에 사탕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것이 진짜 사탕일까 하고 의아해 하는 순간 사탕을 가져가도 좋다고 쓰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가만 보니 관람객들이 사탕을 오물거리며 빨아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는 미술관 한쪽에 사탕이나 인쇄물을 배치하고 그것을 맘대로 가져가게 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마치 ‘작품을 만지지 말라’는 미술관의 권위에 은근히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토레스는 엄숙, 우아, 숭고의 상징인 미술관의 암묵적 금기들을 관객들 스스로 파괴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편견에 맞설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토레스의 작품은 관객이 손을 대는 순간, 비로소 그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작품에는 아주 사적인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있다. 1957년 쿠바 태생인 토레스는 38세의 젊은 나이에 에이즈로 사망했다. 이 작품의 제목은 ‘로스의 초상’(1991)이다. 로스는 토레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연인의 이름이다. 이 작품에 동원된 사탕의 무게가 79㎏인 이유는 에이즈로 조금씩 몸무게를 잃어가기 전, 사랑하던 로스의 정상체중이었기 때문이다. 토레스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했고, 평생 그 주제에 매달렸던 것. 토레스의 사랑과 죽음처럼, 달콤한 사탕은 입에 넣는 순간 녹아 없어지고, 구석에 쌓아놓은 사탕 무더기도 어느새 텅 빈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관객들에 의해 자꾸 줄어드는 사탕의 무게와 에이즈로 인해 쪼그라드는 연인의 몸무게 간 연관성은 무엇일까? 그리고 줄어드는 작품 속 무게를 계속 채워놓는 작가의 행위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알 것 같다. 토레스의 이 작품이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생성과 소멸에 대한 커다란 메타포라는 것을 말이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무상함을 이렇게 기막히게 만든 미니멀 아트는 세상에 두 번 다시 없을 것 같다! 이야말로 새로운 바니타스(vanitas: 허무, 무상) 정물화가 아닌가!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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