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 치는 들판’, 1971~1977년
장마철의 하이라이트는 천둥과 번개다. 사람들은 자연의 이 현상을 흥분보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바라본다. 마치 신의 분노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천둥 번개를 흥미롭게 바라본 예술가가 있다. 미국의 대지 미술가 월터 드 마리아! 그는 번개를 하늘이 그려내는 멋진 드로잉으로 격상시켰다. 그것도 매번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절대로 소유 불가능한 작품으로!
1970년대 월터 드 마리아는 뉴멕시코주의 광활한 사막 들판에 길이 1.6㎞, 폭 1㎞에 7m 높이의 스테인리스 스틸 봉 400개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사각형 모양으로 설치하였다. 이 피뢰침은 의도적으로 번개를 유도하는 것으로 비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번개의 섬광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뉴멕시코 디아 뉴욕미술센터의 후원 아래 영구적으로 전시 보존되고 있는 이 작품은 자연에 감추어져 있는 비가시적인 영역을 가시적인 영역으로 이끌어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지미술은 미국이 낳은 가장 미국적 미술 중 하나다. 그만큼 거대한 대지라는 스케일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대지미술을 보기 위해서는 먼 길을 달려 가야 한다. 로드다큐멘터리를 한편 찍어야 할 정도의 여정이다. 이 작품 역시 뉴멕시코까지 먼 길을 가야 하고, 예약을 해야만 볼 수 있다. 게다가 마리아가 설계한 오두막집에서 채식 식사를 하는 등 엄격한 24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그러고도 번개가 피뢰침에 꽂히는 장면을 보기가 힘들다. 날씨가 도와주어야 한다. 그저 피뢰침들 사이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밖에 없단다.
어떤 미술사학자는 이런 체험이 번개를 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명상을 유도하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번개보다는 빛과 시간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운 좋게 만난 번개는 하늘의 실핏줄 같고, 식물의 잔뿌리 같고, 번뜩이는 영감 같다. 또한 번개는 운명 같은 사랑을 환기한다. 마치 “천둥치는 운명처럼 우리는 만났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말이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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