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자연을 형이상학적으로 보충하는 것이다.” 니체의 이 말을 십분 이해하게 하는 예술가가 있다. 스페인의 조각가 에두아르도 칠리다(1924-2002). 내 서재에 아무렇지도 않게 걸려 있는 복사된 칠리다의 작품사진 몇 점. 나는 자주 나에게 부과된 예술가의 작품을 두고두고 좀 오래 지켜보는 편이다. 대부분 그쪽에서 말을 먼저 걸어주기를 기다리면서, 조금은 갈망하는 시선을 보낸다.
스페인 바스크 해안가에는 칠리다의 ‘바람의 빗 Wind Comb’(1977년)이 서 있다. 서로 다른 위치에 세 점의 조각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바위에서 솟아나온 촉수 같기도 하고, 바닷물을 삼키는 혀 같기도 하며, 폭풍의 잔인함에 묵직하게 대응하고 있는 수호신 같기도 하다. 돌과 쇠의 만남 혹은 접촉! 어쩌면 그것은 태곳적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거대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돌과 쇠, 이 강력한 두 존재의 만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마치 신의 태초의 창조물로서의 남녀의 만남 즉 음양의 합일처럼 더 이상 떼려야 뗄 수 없는 강력한 접속과 충돌을 연상시킨다. 처음에 불같은 사랑이었다가, 나중엔 뼈아픈 투쟁이었다가, 지금은 비로소 지난한 세월을 모두 통과하여, 관대함을 성취한 존재처럼 보이지 않는가? 물에 저항하면서 물을 수용하고, 바람에 저항하면서도 바람을 정돈하는, 이 헌신적인 작품은 얼마나 모순적이며 또 얼마나 조화로운가!
더군다나 이 낯선 사물에 붙여진 경이로운 이름을 보라! ‘바람의 빗’이라니! 거칠고 차디찬 폭풍과 파도와 바람이 쇠로 만든 빗을 통과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 역일까. 그래서 거친 바람은 금세 훈풍이 되고 마는 것일까. 때로 예술가의 상상력은 신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나는 삶을 베낀다. 그러나 삶의 외양을 베끼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가로질러 진화해가는 삶의 행보와 단계를 베낀다. 사물들은 변화하고 진화한다. 나는 작품 속에서 이 진화를 베낀다.”-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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