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광주비엔날레 전시장면, 참여 작가만 무려 160여명에 달했다.
우연히 일본의 트리엔날레 ‘오카야마 아트 서밋’(Okayama Art Summit, 9·27~11·24)에 대한 보도를 접했다. 기자의 관점이 그러했듯 나 또한 국내 사례를 대입하면 너무도 확연해지는 여러 문제점을 이 기사로 인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우선 올해로 2회를 맞이한 이 전시는 국제행사치곤 참여 작가의 수가 17명에 불과해 양으로 승부하는 한국의 비엔날레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 참여 작가는 160여명이었고, 같은 해 열린 부산비엔날레는 줄이고 줄였음에도 66명에 달했다. 심지어 얼마 전 막을 내린 청주공예비엔날레는 작가 수가 무려 1200명을 웃돌아 기사에서 표현된 ‘규모강박증’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공개된 자료만 봐도 ‘오카야마 아트 서밋’은 작은 규모 대비 이색적이라는 인상이 짙다. 일단 2017년 뮌스터조각프로젝트에 ‘앞선 삶 이후’(After Alife Ahead)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여 크게 주목받은 프랑스 작가 피에르 위그가 예술감독을 맡아 시선을 끈다.
무엇보다 작가들의 면면이 녹록지 않다. 레바논 출신의 사운드 아티스트 타렉 아투이를 비롯해 빼어난 쇼맨십과 기발한 착상으로 전시할 때마다 시끌벅적한 이슈를 만들어내는 매튜바니가 참여해 개성 있는 무대를 꾸렸다. 연출된 상황을 이미지의 거세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현대무용가 출신의 티노 세갈이 함께하면서 전시의 풍요로움을 더했다.
이 밖에도 시간과 같이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물질화하는 페르난도 오르테가,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한 컴퓨터 제너레이티드 아트를 미술언어로 삼는 이안 쳉 등 유명과 무명을 넘나드는 작가들이 일당백으로 역할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 일본 작가는 없다. 물론 세계 최고의 미술행사인 제57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주최국 이탈리아 작가는 손에 꼽혔고, ‘하우프트반호프’에 작품을 내건 카셀도큐멘타14 작가 가운데 독일 작가는 아예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견줘 새로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례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극명하게 부각시킨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미술행사의 경우 반드시 한국 작가, 아니 ‘지역 출신 작가’가 끼어 있다. 작품성과 주제에 부합한다면 지역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랴. 그게 아니라 단지 개최지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전시에 넣곤 한다. 그러하지 않을 경우 ‘지역 소외’ 운운하며 반발한다.
스스로를 ‘지역작가’로 묶는 아둔함, 우리 지역에서 우리 세금을 사용하니 우리 지역 작가가 참여해야 한다는 극히 단순한 셈법을 보면 매우 촌스러운 태도이지만 우린 그 딱한 수준을 극복하지 못한다. 지금도 이런 양태가 이어지고 있고, 내년 일제히 개최될 여러 비엔날레를 통해 다시금 증명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작가들은 그런 수혜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예술성에 관한 가치구분에 따른 정당한 개입과 평가를 지향한다. 하지만 지역에서 나름 힘깨나 쓴다는 이들은 헤게모니의 견고함을 위해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행사를 연고주의 혹은 거소(居所)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현재 전국에서 비엔날레 준비가 한창이다. 부디 이번엔 행사와 지역성 모두를 망치는 연고주의를 은폐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지역작가 육성이라는 명분을 이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덩치만 키운다고 의미 있는 행사가 되는 것은 아님을 자각했으면 한다. 이런 글 하나로 그들의 사고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지만 말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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