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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실패한 ‘몽유도원’

미카엘 요한손, 테트리스 청주, 2019 ⓒ홍경한


서양의 미술이 보는 즉시 읽혀지는 것이라면 우리의 옛 그림은 해석에 방점을 두었다. 자연을 그려도 ‘그것’을 모사(模寫)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연관된 ‘마음’을 담았다. 유럽의 미술이 종교와 신화에 치중했다면 우리 미술은 자연주의 사상 아래 인간 내면의 본질을 강조했다.


이처럼 대상의 외형에 치중했던 서양과는 달리 우리의 옛 그림은 뜻과 정신을 옮기는 사의(寫意)를 중시했다.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역시 상징적 서술에 무게를 둔 작품이다. 실제로 본 것은 아니나 인간의 욕망과 바람을 의미적으로 표현한 이 그림은 안평대군이 1447년 4월20일 밤 꿈에 본 풍경을 들은 안견이 3일 만에 그렸다고 전해진다. 


안견의 작품 중 유일하게 제작 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몽유도원도’는 낮은 토산을 현실로, 뾰족하고 거친 산세를 도원(桃園)으로 묘사하고 있다. 도원은 현실참여적인 면모를 지녔던 안평대군의 고민이 밴 꿈속 유토피아였고, 이를 조선 최고의 화가는 그림을 통해 가장 이상화된 세계를 만들어냈다. 


지난 8일 개막한 청주공예비엔날레도 도원을 내세웠다. 주제부터 ‘미래와 꿈의 공예-몽유도원이 펼쳐지다’이다. 1200여 명의 작가 작품 2000여 점이 내걸린 이번 전시의 소개 글에는 “꿈처럼 환상적인 즐거움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공예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새로운 공예의 미래를 열고자 한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엉뚱한 방향으로 갈지자를 그린다.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이 뒤섞여 있어 공예특성화 비엔날레라는 정체성에서부터 혼란스럽다. 본전시에 해당하는 ‘몽상가들’에서처럼 섹션별 작품의 적지 않은 수가 이현령비현령에 머문다. 


예를 들어 방치된 쓰레기를 통해 생태순환과 인간욕망을 등치시킨 강홍석 작가의 설치작품은 상당히 장소 특정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선사하지만 굳이 공예전시가 아니어도 무방하다. 청주에서 버려지는 물건들로 제작된 미카엘 요한손의 야외설치작품 ‘테트리스 청주’ 또한 공예의 이상적 아름다움과는 큰 연관성이 없다. 이병찬의 ‘생명체’라는 제목의 거대 비닐 키네틱 작품마냥 무리하게 끼워 넣은 흔적도 쉽게 드러난다. 생명의 힘과 역동성을 캔버스에 담은 송대섭의 회화 ‘개펄’ 시리즈를 공예 본전시에 넣은 것이나, 정영환의 아크릴 풍경과 몇몇 수묵화 및 족자그림을 보면 흡사 종합미술전을 연상케 한다. 특히 제아무리 몽유도원도의 서사 구조를 차용하고 ‘공예-적’으로 지평을 넓힌 특별전인들 ‘평양의 오후’를 주제로 한 북한사진전과 동물조각 등은 그 자체로 충격이다. 


전시감독이 의식한 결과겠으나 전반적으로 공예작품의 비중은 높다. 하지만 나열식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너무 많은 작품으로 인해 일부 공간은 마치 백화점 매장 같은 착각마저 심어주고, 초대국가관 작가인 중국의 위엔 민쥔이나 팡리쥔의 작품은 공예(工藝)의 의미를 공예(共藝)로 확장한 결과라고 해도 꽤나 억지스럽다.


대체 어디서 이상향의 공예, 새로운 미래의 공예, 공예의 본질을 발견해야 하는지 의아하게 만드는 이번 청주공예비엔날레는 몽유도원을 꿈꿨으나 텍스트상의 논리에 그친 전시감독의 기획력 한계를 보여준다. 주최 측이 제공하는 자화자찬식 자료를 베끼기에 급급한 일부 언론보도와 달리 길을 잃고 헤매는 청주의 현주소를 여실히 드러낸다. 실패한 몽유도원은 그렇게 수십억원의 세금을 낭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