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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유경희의 아트살롱

손들의 춤

로댕, 대성당, 1908년


더 이상 손은 몸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이 손들은 무엇을 붙잡으려 하는 것일까? 무엇을 어루만지려 하는 것일까?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 손들은 전혀 접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각도에서 보면 살짝 닿아 있고, 어떤 부분에서 보면 친밀하게 맞닿아 있다. 저 부유하는 아련한 손들은 시선과 응시라는 내적 필연성에 의해 일체가 되어 있는 동시에, 영원히 합일되지 못할 운명에 대한 암시 같기도 하다.

로댕의 ‘대성당’은 원래 분수장식을 위해 제작되었다. 휘어진 활 모양의 두 손 사이로 물이 솟아오르도록 계획되어 있었던 것. 처음에는 ‘언약의 궤’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나중에는 ‘대성당’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단순한 구성에서 느껴지는 기념비적인 분위기가 성스러운 감정을 갖게 한다는 이유였다. 로댕은 평상시 노트르담 대성당을 고딕예술의 극치로 여겨 흠모했다. 마치 베일처럼 숨어 있는 동시에 드러나는 성당의 분위기를 두 손으로만 표현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대성당’은 여자의 손인지 남자의 손인지 불분명한 두 개의 오른손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신에 도달하기 위해 첨탑을 높였던 고딕성당의 교차하는 궁륭의 우아함을 인용하면서 빈 공간을 압도적으로 점유하고 있다. 저 단순하고 조촐한 두 손으로도 고딕성당의 스케일과 스피리추얼리티(spirituality)를 담보할 수 있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갑자기 손으로만 할 수 있는 섬세한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손으로 형상을 만들어 ‘그림자놀이’ 같은 예술적인 유희를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머리카락을 쓰다듬거나, 얼굴을 어루만져 주거나, 어깨를 꼭 안아 주거나, 등을 쓸어내려 주는 등의 행위들을 떠올리게 된다.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이런 사소한 행위들이야말로 가장 세심한 치유와 위로의 출발일지도 모른다. 한 해를 보내면서 손으로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 존재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전한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