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하나님의 어린양(Lamb of God), 1635~1640년
희생양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쓴 사람’을 비유한다. 희생양 덕분에 진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쉽게 잊혀져 배후의 인물로 남아있게 된다. 이렇듯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사소한 희생을 치른다는 희생양의 메커니즘에는 음모와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신화학자 프레이저는 “우리 죄와 고통을 다른 어떤 존재에게 떠넘겨 우리 대신 감당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미개인에게는 익숙한 사고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미개인에게만 있겠는가? 오늘날 더 미묘하고 저열한 방식으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제의에서 왜 양인가? 아마도 동물 중에 가장 인간적인 것이 채택되었을 것이다. 죽여서는 안되는 순하디 순한 동물을 바쳐야 그런 살해행위가 끔찍하게 여겨진다. 그만큼 드라마틱한 효과를 얻게 된다. 순진무구한 처녀나 흠 없는 어린아이를 희생제물로 바쳤던 이유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양은 대개 맹목성과 어리석음을 뜻한다. 따라서 길 잃은 어린 양은 인간의 보편적인 무지와 나약한 속성을 대변한다. 하지만 의심하지 않고 따라가는 성향 때문에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신 혹은 영적 스승의 가르침을 기꺼이 따라가면서 존재자와의 일치된 본질을 추구하는 대가로 자신의 개인적인 의지를 포기하는 제자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류역사상 예수만한 희생양은 없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아니던가!
17세기 ‘에스파냐의 카라바조’라고 불렸던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은 허식 없는 리얼리즘과 검소한 구도로 정밀하고 엄숙한 신비로움이 흐르는 작품을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주로 명상에 잠겨 있는 성직자, 수사, 수도원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삼아 종교성 짙은 작품을 남겼다. 어떤 컨텍스트도 생략한 채 그저 발이 묶여 단 위에 올려져 있는 희생양은 강한 명함 대비와 더불어 신비롭고 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 그림이야말로 폭력이 성스러움으로 전이되는 순간이 아닌가.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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