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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아직은 헛기술

이정민, Walking Form, 2019, 캔버스에 먹과 아크릴, 96.5×130.2㎝, ⓒ이정민 우손갤러리 제공


‘불안정한 작업환경과 레지던시의 입주로 잦은 이사를 겪으며 점차 도심을 벗어난 외곽지역을 탐색하던’ 이정민은, ‘목적지가 없어야 산책’이라며 소소하게 나선 길,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을 거다. 노트에 옮겨 두었다던 ‘1839년에는 산책 나갈 때 거북이를 데리고 가는 것이 우아해 보였다. 이것은 아케이드를 어떤 속도로 산책했던가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발터 베냐민의 문장을 떠올리기 좋았을 거다. ‘내일의 내가 어디에 있을지를 예측할 수 있는 미래로부터 나의 존재를 다른 위치에 놓는 방법’인 산책은 그저 몸만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었다. ‘변변치 못한 공터와 주변의 작은 숲, 덤불들 주위를 걸으며, 도시도 아니고 도시가 아닌 것도 아닌, 자연 아닌 것도 아니고 자연 그대로의 것도 아닌 주변부의 풍경들이 변두리로부터 모서리를 드러내는 긴밀한 순간들을 엿보던’ 그는, ‘도시에서 발견하는 선과 덩어리, 건축현장에서 마주하는 비계의 선들, 조경용 나무들의 어눌한 상태를 수집’하여 자신이 고민하는 필법으로 화폭에 담는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와 그것을 위한 방법으로 삼던 모든 것들을 재고해야만 한다는 것을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느꼈던’ 시간을 지나 그는 ‘헛기술’이라 명명한 전시를 열었다. “헛기술은 기술(技術)과 기술(記述) 모두를 지칭하는 동시에 말머리에 붙은 ‘헛’이라는 구멍을 통해 양쪽 모두로부터 빠져나간다.”


그 이후, ‘목적 없는 행위들은 어쩌면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지만, 한편으로 싸워야만 얻을 수 있는 자유나 권리 같은 것, 현실의 아이러니를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를지라도 여전히 답 없는 시도를 지속하는 수행적인 태도’라고 말하던 그였지만, 세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로부터 100일이 조금 더 지난 지금, 어떤 죽음들은 주목받고 어떤 죽음들은 방치된다. 자신의 선택이든 아니든, 결국 모든 죽음은 메시지다. 우리의 관성을 반성하며, 떠나간 이들에게 애도를.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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