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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이것은 옷이 아니다

 

양호상, Stereogram #058, 2013


르네 마그리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옷이 아니다. 옷은 모든 입체감을 상실한 채 스스로 배경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아니면 배경이 옷을 집어삼켜 스스로 옷이 되려는 매트리스적 찰나라고 해야 할까. 옷의 환영 혹은 옷의 변장은 이 옷을 걸쳤을 누군가의 존재감을 옅게 만든다.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서의 옷은 이제 더 이상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채 도판처럼 나열될 뿐이다.

 

시각 놀이와도 같은 이 착시를 위해 양호상은 1950~1980년대의 옷 천 벌을 수집했다. 복고풍을 택한 건 유행 또한 시대가 요구한 소비의 방식이었음을 드러내고 싶었던 탓이다. 개성은 때로 유행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만 인정받는다.       

 

작가는 촬영한 옷의 배경을 지우고, 대신 옷의 패턴을 복사해 그 자리에 합성해 넣었다. 컴퓨터 자판의 복사와 붙임 단추를 반복해서 눌러야 하는 이 과정은 판에 박은 듯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는 소비사회의 무한 복제를 은유한다.

 

이 작업의 제목은 스테레오그램. 도상 속에 도상이 숨어 있는 그림이라는 원래의 단어 뜻보다도, 작가에게는 판에 박은 듯 진부함을 뜻하는 스테레오(stereo)라는 어근과 도상을 뜻하는 그램(gram)이라는 어미의 합성어처럼 여겨졌다. 혹은 도상이 아니라 무게를 재는 단위로서의 그램이 될 수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형체를 잃어버리고 평면이 된 옷은 홑겹의 삶처럼 몹시 가벼워서 몇 그램의 무게도 지니지 못할 것만 같다.

 

송수정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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