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도마의 의심’, 캔버스에 유채, 포츠담 신궁전 소장
충격은 착각 때문이었다. 예수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지는 자가 도마(Thomas)가 아니라 바로 나인 것 같다는 착각 말이다. 마치 3D 영화를 보는 듯한 친밀한 접촉의 느낌이었다. 카라바조는 어떻게 캔버스와 관자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버릴 수 있었을까?
‘의심하는 도마’의 주제는 요한복음 20장 24절에 등장한다. 예수의 예언은 기적처럼 일어났다. 무덤에 묻힌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가 살아생전에 예언한 대로 제자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자기 손으로 예수의 상처를 만져보기 전에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 온몸이 축 늘어진 채 죽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8일이 지난 후 제자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 다시 나타난 예수는 의심 많은 도마를 향해 특별히 한 말씀을 하신다.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하여 믿지 않는 자 되지 말고, 믿는 자 되어라.” 그러자 도마는 부끄러워하며 “나의 주, 나의 신이시여”라고 대답한다.
6세기쯤부터 미술작품의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의심하는 도마’는 17세기 반종교개혁 시기에 가톨릭의 교리를 강조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었다. 바로크 미술의 거장 카라바조가 그린 이 그림은 의혹이 믿음으로 바뀌는 순간에 대한 탁월한 묘사다. 카라바조는 르네상스적 종교화에 바로크적 풍속화를 도입하는 한편, 바로크 미술의 핵심기법인 키아로스쿠로(명암법)를 드라마틱하게 구사한 화가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생생한 현장감은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와 ‘빛의 효과’에서 비롯된 것! 그뿐 아니다. “집시와 거지 그리고 창녀들. 그들만이 나의 스승이며 내 영감의 원천”이라는 평상시의 말대로, 남루하고 가난한 이웃을 모델로 한 점 또한 카라바조 사실주의의 핵심이다. 미술사에 살인자로 남아있는 요절한 천재화가 덕분에 어떤 시뮬레이션보다 더한 감각의 극한을 사용해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우리는 복되지 않은가?!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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