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틴 마시스, ‘그로테스크한 늙은 여인’, 1525~1530년(출처 :경향DB)
사람들은 죽음보다 늙음을 더 비참하게 여기는 것 같다. 젊은 시절 여배우가 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영영 은막을 떠나듯이 늙은 모습을 과시하는 여자는 거의 없다. 더구나 미술사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의무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7세기 바로크 시대 이전까지는 늙은 여자가 그려지는 예가 거의 없었다. 늙음은 병듦과 마찬가지로 천대받고 무시당해도 어쩔 수 없는 시절이었으며, 노인은 측은한 존재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존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시절이었다.
퀸틴 마시스의 ‘그로테스크한 늙은 여인’(1525~1530)은 생전에 아주 추악한 인물이었던 티롤의 공작부인 마가렛 마울타시의 초상으로 추정된다. 한편으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즐겨 그렸던 광인과 기형인 그리고 추녀와 추남 등의 드로잉을 참고해 그렸을 것으로도 보인다. 그림 속 늙은 여자는 큰 귀와 굵은 주름, 원숭이같은 얼굴을 가졌다. 그런 얼굴은 그녀가 쓴 정교한 장식 모자와 대조되어 더욱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화가는 이 그림을 친구였던 에라스무스가 <어리석음의 천국>이라는 책에서 묘사했던, 나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며, 혐오감을 일으키는 쭈글쭈글한 가슴을 노출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유혹녀를 흉내 내고자 하는 늙은 여자를 그린 것이다. 더 이상 유혹을 할 수 없는, 여성성을 잃어버린 늙은 여자의 꽃단장은 인생의 허무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이 그림은 실제 추녀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라기보다는 유혹하려는 늙은 여자의 몸만큼 비참하다 못해 웃기는 존재가 어디에 있겠느냐는 일갈처럼 느껴진다. 갑자기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오른다. 그라면 이런 여자를 품어주지 않았을까? 자신의 화양연화, 즉 꽃 같던 시절을 잊지 못해 늦은 오후가 되면 창가에서 오지 않는 남정네를 기다리는 늙은 창녀를 보고, ‘어찌 저 여자를 사랑해주지 않을 수 있겠느냐’던 조르바의 말이 귓전에 아련하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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