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옥수동 고가 하부 틈 속 놀이터. 도시 속 다양한 여백의 공간에서 어린이는 자신만의 틈을 찾아 노는 체험을 통해 누구도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을 배운다. 만아츠만액츠
엇비슷한 아파트들로 도시가 빼곡히 채워지기 이전 주택들로 이루어진 나의 동네는 모든 집들이 각기 다른 놀이터였다. 담장과 집의 틈, 계단 아래 틈, 다락, 벽장 안의 틈, 지하창고. 자신만의 놀이로 채울 수 있는 실로 다양하고 풍성한 틈들이 있었다. 주변 곳곳에 규정되지 않은 틈을 나만의 개성적인 놀이터로 활용한 것이, 돌이켜보면 오늘날 건축가로서 창의적인 발상을 하게 만든 중요한 밑거름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기서의 ‘틈’이란 한자로 ‘사이 간(間)’에 해당한다. 건축은 인간(人間)이 앞으로 보낼 시간(時間)을 위한 공간(空間)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사람들 사이의 틈’, 시간은 ‘순간순간 사이의 틈’, 공간이란 ‘관계 짓기를 위한 틈’을 말한다. 어떻게 보면 인생이란 이 중요한 ‘틈’들을 얼마나 의미 있게 채우며 살아갈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늘 건축가로서 고민하는 것이 어린이를 위한 공간이다. 어린이도 대부분 시설의 중요한 이용자이므로 어떻게든 나는 항상 호기심이 가득 넘치는 이들을 위해 아무리 딱딱한 건축이라도 재미있는 ‘틈’을 담아내려 애쓴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가 무색하게 매번 현실에서 틈새는 잠재적 사고의 요인으로서 철저히 배척당한다. 관리자에 의해 갑자기 답답한 난간 벽이 들어서거나, 커다란 화분으로 생뚱맞게 채워지고 만다. 우리 사회와 교육은 늘 어린이의 창의력에 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개성과 창의성을 키우도록 하는 발상과 위험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배제하고 철저하게 관리된 환경에서 마음껏 뛰어놀라는 것은 모순이다. 올라가다 넘어지면 위험하다는 것도 모르고 자라는 아이가 자기관리 능력을 스스로 체득할 수 있을까. 과잉보호 속에서 아이가 살아 있는 긴장감을 느끼고, 스스로 뭔가를 궁리하고 타개하는 창조력을 키울 수 있을까.
<비밀기지 만들기>의 저자 오가타 다카히로는 이렇게 말한다. “위기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아이들은 실제 위험에 둔감하다.” 창의적인 놀이터란 크고 작은 다양한 위험들을 경험하는 일과 같다. 어린이들의 가장 큰 불행은 일상 속에서 마음껏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공간적 틈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여기저기 틈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또 산과 들로 확장되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어른이 정해준 규칙이나 틀이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스스로 궁리해서 놀이를 만들고 또 다소의 상처를 입으며 건강하게 성장했다. 자연과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고 위험한 행동을 하면 아픔이 뒤따른다는 것도 배웠다. 안전이라는 미명하에 어린이를 과보호의 테두리 속에 억압하는 부모와 사회 시스템이 아이들의 창의성과 자립성을 방해하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조진만 건축가 jojinma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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