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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만의 도발하는 건축

기술의 진보로 점점 옅어지는 공간의 의미

<그림1> 르쿠엥트(1793)의 육군병원과 풀무로 작동하는 환기 체계(왼쪽 사진). <그림2> 마레와 스프로(1782)의 병원 계획. 상부의 단면도와 하부의 평면도 모두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다.


18세기 세균학이 정립되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오염된 공기가 전염병을 전파한다는 공기감염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치유의 공간인 병원 건축은 늘 공기의 흐름이 주요 과제였다. 과학자 보일의 기체 연구를 토대로 병실의 환기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한가지 방식은 &lt;그림1&gt;과 같이 커다란 풀무를 건물 외벽에 설치하여 정화된 공기를 주기적으로 공급하였고, 또 다른 방식은 &lt;그림2&gt;와 같이 공기 흐름을 고려한 건축물을 설계하는 방식이다. 의사 마레와 건축가 스프로의 협업에 의한 1782년 설계도를 보면 병동은 공기가 흐르는 형태 그 자체를 따른다. 평면적으로 모서리 없이 부드럽게 호를 그리며 단면적으로는 위가 좁고 높은 반원형 곡면을 통해 공간 자체가 공기를 자연스레 통과하는 방식이다. 의학적 전문 지식이 건축물 형태를 부여하고, 호흡하는 기계로서의 건축이 탄생한 것이다.


19세기 영국은 과밀화된 도시의 열악한 위생 수준으로 인해 여러 질병이 창궐하였다. 다수의 공중목욕탕과 공공세탁장이 건설되고 1848년 공중위생법이 제정되었다. 개선의 대상은 비단 시설물과 규정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차원까지 확대되었다. 비위생적인 것은 죄악이었다. 청결함과 도덕관념을 결합하여 사람들의 의식을 개혁하였다. 근대 건축운동이 청결의 표식인 순백색을 선호한 것은 단순히 미학적인 차원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위생 개념도 내포하고 있었다. 건축가는 순백의 건축물들을 통해 이전의 어둡고 비위생적인 도시 환경을 치유하는 의사이기도 하였다. 


20세기에는 눈부신 설비와 기술 발달 덕분에 하나의 작은 도시라고 부를 만한 복잡하고도 거대한 규모의 병원이 나타났다. 수천명의 환자를 수용하며 정교한 기계와도 같이 작동하는 거대 복합 병원에서는 더 이상 이전 건축가들의 고민-쾌적한 공기의 흐름을 고려한 건축물 형태-을 볼 수 없다. 첨단기술 속 모든 것은 커지고 효율화되었지만 공간 그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되레 감소하였다. 공간으로서 창의 위치라던가 유선형의 평면보다 천장 속 보이지 않는 강력한 공기조화기계의 효율이 모든 것을 압도하였다. 


이러한 기술진보의 다음 종착지는 어디일까. 사물인터넷이나 인공지능의 비약적인 발전, 코로나19와 같은 현대적 전염병은 병원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가. 


건축학자 알렉산더 초니스는 “효율적이고 숭고하며 건강을 고려한 대성당을 세운 기술이 이번에는 그 대성당을 폐허화시킬 것이다. 그때가 오면 거대한 신앙(병원)은 갈 곳을 잃고 홈닥터의 책상 속으로 깔끔히 수납될 것이다”라고 했다. 즉 미래에는 병원의 기능이 공기와도 같이 일상 속 기기들로 흡수되고 시설 자체의 존재 의미는 점점 옅어질 것이다.


<조진만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