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9년, 루브르 박물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인 1816년 7월2일, 프랑스의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전 국민은 분노했다. 자격도 갖추지 않은 채 왕실의 연줄로 선장이 된 사람으로 인해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메두사호는 당시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세네갈로 향하던 길이었다. 자국의 군인들과 이주민 등 400여명을 태운 이 배가 침몰하자 선장과 고급 선원 등 250명은 구명보트를 타고 떠났고, 나머지 하급 선원과 승객 등 149명은 급조된 뗏목을 타고 표류했다. 12일에 걸친 표류 끝에 작은 범선 아르귀스호에 의해 구조되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5명뿐이었다.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는 사회적 화제가 된 이 사건을 그림으로 구상한다. 실제로 그는 난파선의 뗏목 모형을 만들었다. 또한 일일이 생존자들을 인터뷰하여, 살아남기 위해 죽은 동료의 살을 먹었다는 등의 증언을 기록했다. 그 후에도 시신안치소를 찾아가 시신의 상태를 연구하며 수많은 데생과 스케치를 했다. 제리코는 이를 토대로 난파 후 뗏목을 타고 굶주림과 죽음 속에서 망망대해를 방황하다 결국 수평선 위에 기적적으로 나타난 구조선을 발견하는 순간의 환희를 드라마틱하게 포착했다. 먹구름 낀 하늘 아래 뗏목은 강풍과 격랑에 출렁거린다. 수평선 멀리 범선을 목격한 건장한 남자가 물통에 올라가 옷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하고, 그 뒤의 사람은 그가 떨어지지 않도록 온갖 힘을 다하여 움켜쥐고 있다. 뗏목 가장자리에는 생사를 오가는 사람과, 떠내려갈 듯한 시신, 이미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 보인다.
1819년 이 작품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평판이 엇갈렸다. 비평가들은 작품 자체보다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호평과 혹평을 했다. 이듬해 절망에 빠진 제리코는 영국으로 갔고, 그곳에서는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화가는 젊은 나이에 낙마하여 세상을 떠났지만 후에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많은 낭만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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