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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

나만 마음껏 엄지와 검지 사이에 놓인 거울은 매우 작다. 손바닥보다 작은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려면 주의를 기울여야만 할 것 같다. 더욱이 손에 주름이 가득하다면, 손목에 링거를 꽂고 있다면 그 좁은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조준하는 것 자체가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링거를 꽂은 손목을 움직여 거울을 잡고 얼굴을 매만지는 일은 특별한 의식처럼 느껴진다. 또 턱과 목의 주름에 비해 지나치게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노인이라도 환자라도 포기할 수 없는 카랑카랑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사진 속 인물은 안초롱 작가의 할머니다. 대장암 수술을 받고 입원한 할머니의 병실에서 촬영했다. 작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사진 속 할머니는 암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머리를 감고, 환자복도 갈아입고, 화장까지 하셨다고 한다. 도.. 더보기
고문과 테니스 사진 속 높은 건물의 5층을 보자. 유난히 창문이 좁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예 창문을 없앤 것도 아니고, 겨우 팔 하나 들어갈 좁은 창문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이 건물은 남영동 대공분실로 통했던 치안본부, 5층은 고문실로 사용됐다.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숨을 거둔 509호에도, 김근태 전 의원이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던 515호에도 저 좁은 창문으로 한 줌의 햇빛이 들어왔다. 사람이 사람에게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당해도, 햇빛과 하늘은 변함없이 반짝였을 것이다. 아예 창문을 없애 세상과 단절되는 것보다 감질나게 보이는 세상에 더 모욕적인 고립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5층에는 창문만 작은 것이 아니다. 방마다 욕조도 120㎝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당시 백형조 치안본부 대공5차장은 “피의자가 피곤.. 더보기
과거가 과거를 부르는 밤 그런 밤들이 있다. 라디오에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의 목소리가 연이어 흐르는 밤. 짙은 어둠 속에 퍼지는 죽은 자의 노래가 산 자의 입으로 옮아가는 밤. 입술이 더듬은 노랫말에서 오래된 이미지가 쏟아지는 밤. 죽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밤. 과거가 과거를 부르는 밤. 330장의 사진과 67페이지의 문장 그리고 60분의 음악으로 구성된 김주원의 ‘과거가 과거를 부르는 밤’은 죽은 자와 산 자, 말과 이미지, 기억과 과거가 끝말잇기처럼 이어지고 ‘수신되지 않는 신호’처럼 끊어진다. 가령, 첫 조카의 생일축하를 위해 풍선을 매달던 아버지가 다음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조카의 생일을 기념하는 사진은 돌연 죽음을 환기하는 이미지가 된다. 아버지가 숨을 거둔 후에도 풍선에는 그의 숨이 남았을 것이다. 삶과 .. 더보기
가장 멀리 간 사진 1972년 4월16일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열 번째 유인우주선 아폴로 16호를 발사했다. 우주선에는 선장인 존 영, 사령선 조종사 켄 매팅리, 달 착륙선 조종사 찰스 듀크까지 모두 세 명의 승무원이 탑승했다. 우주선 추진계의 수평유지 장치에 문제가 생겨 달 착륙이 중단될 뻔했지만, 무사히 발사 4일 후 달에 안착했다. 승무원들은 달의 데카르트 고지를 3일간 탐사했고, 월면차량의 성능 테스트를 했다. 이때 월면차량이 도달한 시속 18㎞는 달 표면에서 바퀴 달린 탈것이 낸 최고속도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월면활동은 20시간14분으로 최장시간을 기록했고, 95㎏의 월석도 채취했다. 그러나 아폴로 16호는 화려한 기록보다 소박한 사진 한 장으로 기억된다. 승무원 중 찰스 듀크는 가족사진을 비닐백에 담아 .. 더보기
남산 사진사 두 남자가 똑같은 모자를 쓰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똑같은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다. 소송윤씨와 김한식씨, 두 사람은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남산 사진사이다. 80년대 초 팔각정, 분수대, 야외음악당 등 구역을 나눠 남산에서 영업했던 사진사는 90여명이었다. 당시 서울 관광의 필수 코스인 남산은 일거리가 가장 많은 곳이었다. 남산 사진사가 되려면 ‘남산사진협회’에 가입하고, 자릿세를 내야 할 정도였다. 남산뿐만 아니라 경복궁과 창경궁, 어린이대공원 등 전국의 유원지마다 사진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입학식, 졸업식, 소풍, 운동회 등 한 가정의 중요한 행사가 열리는 곳에도 등장했다. ‘사진’ 또는 ‘촬영’이라고 쓴 완장을 팔에 차고, 필름 사진과 즉석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들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 더보기
하얀 원피스, 검은 다리털 레이스 장식이 달린 하얀 원피스를 입고, 벨벳 소재의 폴라넥 티셔츠와 양말 그리고 립스틱 색까지 핑크빛으로 맞췄다. 가지런한 단발머리에 화려한 귀고리까지 여성스럽다. 손목에는 투박한 쇠팔찌를 차고, 팔뚝에는 엉성한 문신이 있다. 다리를 벌리고 쭈그려 앉은 자세에 거뭇한 다리털까지 전혀 여성스럽지 않다. ‘여성스러움’과 ‘여성스럽지 않음’ 상반된 특징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나타나는 모습은 당혹스럽다. 그런데 둘 사이를 나눴던 나의 기준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는가. 스웨덴의 사진작가 겸 모델인 아르비다 비스트룀이 출연한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 광고 사진이다. 비스트룀은 인스타그램에서 다리, 겨드랑이, 사타구니 등의 털을 드러낸 셀피로 유명하다. 신체 부위와 체모의 노출, 생리혈 등 인스타그램에서 필터링하는 사.. 더보기
여기, 그를 보라 한 프레임 안에 여러 얼굴이 어지럽게 중첩되어 있다. 다중노출과 장노출로 얼굴의 윤곽이 뒤섞이고, 이목구비가 허물어진 형상은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초상화를 닮았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이 서늘해지는 건, 단순히 그로테스크한 형상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존재가 분열하거나 해체되는 고통의 순간이 가시화된다면,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선명한 얼굴이 담긴 초상 사진을 바라볼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이 연동된다. ‘그는 누구인가?’ 사진 속의 그가 어떤 존재인지 식별하려는 인식 능력이 발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뼈와 살이 마구 뒤엉켜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얼굴을 분별하기 어려운 권순관의 초상 사진은 우리의 인식 능력을 무력화시킨다. 이 사진을 바라볼수록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 더보기
그릴수록 사라지면 부원희의 시구절처럼 ‘자꾸만 갸웃대며/뒤뚱거리는’ 날들을 보내면서 화가 박세진은 검은 그림을 그렸다. 애초에 검은 캔버스는 물감을 올려 색과 형태를 표현해봐야 그저 삼켜버렸고, 반복적으로 쌓은 유화물감의 반사층만 남아 간혹 반들거렸다. 박세진은 검은 그림을 그리면서, 그릴수록 사라지는 지난 1년의 노력과 고생 끝에 깨닫고 말았다. “흰색 바탕에서 시작했으면 쉬웠겠다.” 검은 화면에서 형태는 뭔가 지나가고 난 뒤의 흔적처럼, 어쩌다 남은 얼룩처럼 있었다. 애초에 흰색 바탕을 선택하지 못한 그는, 흔적과 얼룩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위한 다른 통로가 필요하다. 화가는 햇빛 찬란한 여름날 역광 안으로 들어가 그 한때의 어두움을 캔버스에 담았다. 화면 한가운데에는 인물인 듯, 돌인 듯 무언가를 앉혔다. 어.. 더보기
강력한 열망 1899년 8월 어느 달 없는 밤, 해양생물학자 루이 부탕은 프랑스 남부 바뉼쉬르메르 지역의 바닷가에서 배에 짐을 싣고 있었다. 산소를 채운 커다란 나무통과 수중에서 사용할 수 있는 램프 등 온갖 장비를 싣는 데에만 1시간이 걸렸다. 대단한 해양탐사가 시작되는 낌새를 풍겼던 루이 부탕의 목표는 당연히 미지의 해양생물일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바닷속에서 연구한 대상은 바로 ‘사진’이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수중사진’이 바로 그날의 연구 결과다. 루이 부탕은 수심 50m에서 루마니아의 해양학자 에밀 라코비차를 촬영했다. “Photographie Sous Marine(수중사진)”이라고 쓰인 팻말을 든 모델과 촬영자는 사진 한 장을 위해 수심 50m에서 30분 동안 질소마취에 시달려야만 했다. 최신식 장비.. 더보기
80년생 아파트 우거진 나무들은 녹색 파도처럼, 아파트는 떠다니는 하얀 배처럼 보인다. 녹색 바다를 이루는 나무들은 아파트의 나이테 역할을 한다. 몸집의 크기로 아파트 연령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마흔을 앞둔, 1980년생 둔촌주공아파트는 철거를 진행 중이다. 오래된 아파트가 허물어진 자리에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은 도시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렇게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며 변화해야만 도시는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태어나 어른이 되기까지 생애주기를 아파트 단지와 동기화한 이들에겐, 그저 ‘흔한 일’로만 단념할 수 없다. 이곳이 고향이자 기억의 뿌리인 80년대생 아파트 키드를 중심으로 둔촌주공아파트에 관한 기억을 간직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 사진을 찍은 최종언 또한 아파트 키드이자 아파트 덕후다. 트위.. 더보기
아는 얼굴 한 사내가 심각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1839년에 촬영된 낡은 사진은 비록 유령처럼 희미하지만 헝클어진 곱슬머리와 오뚝한 콧날, 진지한 눈빛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이름은 로버트 코닐리어스, 미국 사진술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그럼, 이 사진의 촬영자는 누굴까? 바로 코닐리어스 자신이다. 프랑스에서 사진의 발명을 공표한 1839년과 같은 해에 벌써 셀카 사진이 등장한 셈이다. 코닐리어스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아버지의 램프 가게 뒤편에 설치한 카메라 앞에서 10분가량 꼼짝 않고 있다가 자신의 얼굴을 얻었다. 최초의 사진술인 다게레오타이프로 촬영된 이 사진은 세계 최초의 셀프 포트레이트로 간주된다. 170여년 전 코닐리어스의 첫 장 이후, 오늘날 셀카 사진은 하루에 3억5000장이 인터넷에 올라온.. 더보기
동물원과 권총 1906년 이색적인 구경거리를 준비한 미국 뉴욕의 브롱크스 동물원은 흥행 중이었다. 나이 23세, 키 150㎝, 몸무게 45㎏, 난생처음 본 동물 앞에서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던져주며 환호했다. 몇몇 구경꾼들은 내심 기대했던 눈요깃거리가 못 되자 야유와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격렬한 환호와 야유를 한몸에 받은 새로운 구경거리는 바로 인간이었다. 아프리카 콩고의 피그미족 오타 벵가(Ota Benga)는 브롱크스 동물원의 원숭이 우리에 전시됐다. 그는 1904년 콩고를 침략한 벨기에군의 학살로 가족을 잃은 후 생포되어 노예 상인에게 팔렸고,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만국박람회와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됐다. 동물원에 온 이후, 처음에는 사육사를 도와 침팬지에게 먹이를 주며 동물들을 돌보기도 했지만, 차츰 자신의 .. 더보기
서울의 목욕탕 오래되고 낡은 목욕탕 안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물함과 텔레비전, 냉장고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손님이 줄었거나 혹은 자판기라도 들여와서 퇴역했을 냉장고는 본연의 임무 대신 텔레비전 받침대로 사용된다. 플러그가 꽂혔던 왕년에는, 목욕을 마친 꼬마들이 저 냉장고에 뽀얀 얼굴을 들이밀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바나나 우유와 딸기 우유 사이에서. 사진책 (6699프레스, 2018)에 담긴 장면 중의 하나다. 책은 서울에 위치한 30년 이상 된 목욕탕 10곳의 일상적인 풍경과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채집해 전달한다. 시간의 무게에 부서지고 허물어지는 목욕탕의 외관에서, 대야와 앉은뱅이 의자 등 더 이상 새것으로 바뀌지 않을 목욕탕 기물에 묻은 손때까지 모두 사진에 살뜰하게 담겼다. 그 이미지들은.. 더보기
검은 장갑 1968년 10월17일 멕시코 올림픽에서 육상 남자 200m 시상식이 열렸다. 미국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금메달과 동메달을 땄다. 영광스러운 자리인 시상식에는 기쁨과 환호 대신 한숨과 야유가 터져나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시상대에 맨발로 올랐다. 미국 국가가 나올 때 고개를 푹 숙이고 검은 장감을 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이른바, 흑인 저항운동 ‘블랙파워’에 지지를 표시하는 ‘블랙파워 설루트(Black Power Salute)였다. 스미스의 목에 두른 검은 스카프는 흑인의 자존심을 상징하며, 카를로스가 지녔던 묵주는 희생당한 흑인들을 기리는 것이었다. 이후 두 선수는 메달을 박탈당하고 선수촌에서 추방됐다. 50년 전의 그들을 닮은 풋볼 선수 콜린 캐퍼.. 더보기
로우-컷 김천수의 사진전 (일우스페이스, ~10·2)는 강북의 한 고급아파트를 독특하고 기묘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작가는 개발 당시 갈등과 논란이 빚어졌던 그 아파트를 다양한 거리와 앵글에서 접근했다. 그리고 아파트가 완공되기 이전의 풍경들 또는 설계도와 평면도에서 차용한 아우트라인을 사진 위에 흰색 먹줄로 튕겨 중첩시켰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탐색하려는 문제는 ‘현대 도시의 과밀성’이다. 도시는 한정된 공간 안에 다양한 편의 시설과 많은 인구를 집중시키며 발전한다. 고층 건물, 주차 타워, 상업 지역, 역세권 등 또한 효율성의 논리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작은 폭탄이 터져도, 잠시 정전되어도 도시에서 더 큰 피해를 입는다. 효율을 극대화한 도시 재개발이 심각한 갈등을 낳는 것 또한 마찬가지.. 더보기
장면과 날짜 논 옆에 밀짚모자를 쓰고 바지를 걷어붙인 남자가 걸어간다. 농부라고 하기에는 밝은색 점퍼 안에 입은 셔츠와 뿔테 안경이 어색하다. 아무리 봐도 농부가 아니라 관료에 가까운 남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다. 경기도 김포에서 모심기에 참석했다. 매년 봄 신문에 등장할 만한 사진으로, 특별한 장면은 아니다. 그러나 촬영된 날짜를 살펴보면 모멸감이 치밀어 오른다. 1980년 5월28일, 5·18민주화운동이 진압된 다음날이다. 27일 새벽 3시 광주에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진입했다.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애절한 가두방송이 채워지고, 오후 4시10분 계엄군은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시민들에게 사격했다. 무려 2만5000여명의 군인이 투입되어 오후 5시10분 진압 종료가 선언되었다.. 더보기
빛나지 않아도 Untitled_hawon1695, 2013 ⓒ김옥선 사진에는 눈부신 제주도의 하늘이나 싱그럽게 푸른 야자수가 없었다. 햇빛이 표백된 회색빛 하늘, 활력 없이 타들어가는 야자수, 모든 것은 볼품없이 회색빛으로 말라갔다. 사람의 얼굴마저도 회색빛으로 보였다. 남성도 여성도, 원주민도 이방인도 아닌, 모두 생기가 빠진 회색인일 뿐이었다. 하늘과 야자수, 사람들까지 사진 속에서는 모두 빛을 잃어가는 회색의 존재였다. 빛나는 백(白)으로 태어나 빛을 잃고 어두운 흑(黑)으로 향하는 회색. 백과 흑, 어느 쪽도 아니면서도 둘을 동시에 지닌 회색. 흙과 먼지가 묻고 점점 녹아가면서 다시 하얗게 빛날 수 없는 눈사람의 회색. 그런 회색빛만 가득한 사진은 ‘모든 존재는 빛난다’거나 ‘저마다 빛나는 순간이 있다’고 말하.. 더보기
떠나는 시선 잘생기고 유능한 패션 사진가 로맹은 어느 날 갑자기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제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한 그는 주변에 어긋난 관계만 남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연인, 여동생, 아버지 등 모두 그에게 분명 소중한 이들이지만,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조차 털어놓지 못할 만큼 관계가 소원하다. 유일하게 할머니에게만 자신의 상황을 고백한 그는 홀로 담담하고 조용하게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한다.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 는 죽음을 앞둔 자의 시간을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죽음 앞에서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라는 매우 사진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영화는 죽음을 선고받은 후, 콤팩트 카메라로 끊임없이 사진을 찍는 로맹을 자주 보여준다. 화해하지 못한 연인, 여동생, 아버지 앞에서도 카메라를 드는 그의.. 더보기
빛났던 목소리 솔직히 노회찬에 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그를 좋아했다면, 결국 그가 했던 말을 좋아한 것이다. 국내 정치인 중에서 가장 알아듣기 쉽게 말했던 그의 화법은, 정치 고수로 통용되던 김종필식 선문답과 매우 대조적이다. 고도의 복선이 깔렸다는 김종필씨의 말에서 무엇을 했다는 건지, 누구의 잘잘못인지 파악할 수 없다. 전형적인 정치인의 화법으로, 말 바꾸기와 책임회피에 유용한 방식이다. 고수끼리는 통한다는 이 화법에는 시민은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특권의식이 숨어 있다. 그런가 하면 박근혜식 동문서답도 노회찬의 화법과 대비된다. 기자의 질문에 횡설수설했던 박 전 대통령의 대답에는 논리가 없다. 효과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려면 논리가 필요하며, 그래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더보기
겉과 속 아주 옅은 살색 벽면에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가 미묘한 차이로 빛난다. 그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네모난 구멍이 있고, 그 아래에는 왜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는 판이 벽면의 겉과 속을 가로지른다. 색감과 재질로 보아 벽면과 같은 자재로 보인다. 벽면의 겉이 되는 판이 벽면의 속을 침투한 모양새라 흥미롭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구멍을 통해 벽 속에 다양한 자재가 숨겨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얇디얇은 판 하나를 경계로 눈에 보이는 ‘겉’과 보이지 않는 ‘속’이 나뉜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정지현의 사진 연작 ‘CONSTRUCT’는 건물이 완성된 이후에는 마감재의 표면에 가려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감춰지는 건축 자재와 공법 등을 가시화한다. 그동안 건물의 해체 과정에서 신축 현장까지 건축의 생애주기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