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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에 해당되는 글 37건

  1. 2018.04.20 컵의 숫자만큼
  2. 2018.04.13 사이의 무게
  3. 2018.04.06 세상이 바뀔 때마다
  4. 2018.03.30 다시, 작은 세계
  5. 2018.03.23 로스트 앤드 파운드
  6. 2018.03.16 생애를 건 목소리
  7. 2018.03.09 그대로 제자리
  8. 2018.03.02 아득한 속도
  9. 2018.02.23 보통의 영웅들
  10. 2018.02.09 부르쥔 주먹과 목소리
  11. 2018.02.05 하얀 신음
  12. 2018.01.29 고양이
  13. 2018.01.22 영혼의 무게
  14. 2018.01.12 들리지 않는 눈물
  15. 2018.01.05 엄마는 24시간
  16. 2017.12.29 깊은 구멍
  17. 2017.12.22 세 얼굴 사이에
  18. 2017.12.15 그들만의 영광과 굴욕
  19. 2017.12.01 둘을 위한 기념사진
  20. 2017.11.20 웃는 남자

이 사진은 매우 무섭고 섬뜩하다. 테이블에 놓인 수저통과 양념통, 주전자, 양옆의 컵까지 모두 무섭다. 뒤에 걸린 태극기와 양옆에 쓰인 ‘자조’, ‘자립’이라는 단어 또한 섬뜩하다. 도대체 이것이 왜 무섭고, 섬뜩하단 말인가? 사진 속의 이곳은 형제복지원의 식당이기 때문이다.

 

부산 형제복지원의 대규모 식당 전경, 1981년. 경향신문사 자료사진

 

형제복지원은 1960년대 문을 열어 1987년까지 3164명을 수용했던 전국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다. 불법감금과 강제노역, 구타와 고문이 자행됐던 이곳에서 513명이 사망했다.

 

사진 속에 가지런한 도구들은 513명에서 3164명까지 악몽을 겪었을 그들의 존재를 각인시켜준다. 단지 숫자가 아니라 식당에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고 물을 마셨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저 많은 컵만큼, 저 커다란 식당을 채웠을 만큼 누군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각성시켜준다.

 

그들은 이유 없이 끌려와 갇혔고, 이유도 모른 채 굶주려 죽거나 맞아 죽었다. 일부 시신은 300만~500만원에 대학병원의 해부학 실습용으로도 팔려갔다. 1975년부터 1986년 사이에 513명이 죽었지만, 정부 당국의 수용 정책과 시설 운영자들의 경제적 타산이 일치되면서 무려 12년 동안 진실은 은폐되었다. 이처럼 끔찍한 인권 유린이 벌어졌지만, 1989년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에게 내려진 최종 선고는 고작 징역 2년6월. 관계 당국의 직무유기, 부정과 비리행위 없이도 이 모든 일이 가능했을까? 사진 속 태극기가 무섭고 섬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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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light volume ⓒ이민지


물기 먹은 바닥에서 팔과 다리가 돌과 물병에 붙잡힌 비닐 우의는 사람의 허물 같다. 바람이 불자 투명한 허물은 진짜 사람이 숨을 내쉬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신기하게도 그 어떤 무생물도 숨을 쉬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숨을 멈추면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숨이 있고 없고, 이 얄팍한 차이로 삶과 죽음의 아득한 간격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판가름된다는 것은 꽤 아이러니하다. 사진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지만 숨을 쉬는 몸뚱이는 역설적으로 살아 있었지만 숨을 멈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이민지의 ‘라이트 볼륨’ 연작에서 작가의 시선은 숨이 있고 없고, 그 사이와 차이에 머문다. 그 눈길은 마치 ‘혹시 숨을 쉬지 않는 걸까’ 싶어 코 주위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는 마음과 닮았다. 문득 너무나 가까워진 죽음 앞에서 극도의 긴장감과 조심스러움이 교차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눈길과 마음으로 포착한 할머니의 임종 전후의 풍경과 사물은 물을 잔뜩 먹은 스펀지처럼 막막한 불안감과 투명한 체념이 묻어 있다. 막막함과 투명함 사이, 숨이 있고 없고의 차이, 그 간격의 무게는 과연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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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오른팔을 들어 팔뚝질을 한다. 사진에서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바라보면 함성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의 불끈 쥔 주먹과 구호가 향하는 곳은 ‘한열이를 살려내라’고 적힌 커다란 걸개그림이다.   

 

 

큰 규모의 시위나 집회, 장례 행렬마다 대형 걸개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모인 연유를 시각적으로 요약하는 걸개그림의 모티프는 대부분 사람들의 기억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사진에서 비롯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한열이를 살려내라’가 그랬고,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의 ‘노동해방도’도 그랬다.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어머니 영정을 끌어안은 상주 전태일의 모습이 담긴 걸개그림이 앞장섰다. 단순히 현장을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진이 투쟁의 현장에서 구심점이 되는 걸개그림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바다에서 떠오른 젊은이의 사진 한 장이 커다란 투쟁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이한열 열사 추모제, 1989년 6월9일 ⓒ박용수

 

그러나, ‘사진 한 장이 세상을 바꾼다’고 쉽게 흥분하지는 말자. 엄밀히 말하면 세상을 바꾸는 건 사진 한 장이 아니라 사진에 반응한 사람들의 힘이다. 사진 한 장이 사람들을 광장으로 불러 모으는 촉매 역할을 하지만, 그건 사진 마음대로 또는 사진가의 의지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결국, 사진을 본 사람들이 함께 반응하고 움직여야 생기는 결과인 셈이다. 세상이 바뀌는 고비마다 사진이 함께 깃들어 우리의 기억과 망각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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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기억 #여름방학2, 2017 ⓒ권도연 (제공_갤러리 룩스)


간신히 책의 몰골로 남은 종이 뭉치들이 재처럼 바스라질 것 같다. 영안실의 시신처럼 표본실의 표본처럼 창백한 얼굴을 카메라 앞에 드러낸다. 플래시의 강한 섬광과 함께 방부된 종이 얼굴에서 책의 영정을 떠올린다.

 

개인전 <섬광기억>(갤러리 룩스, ~4월22일)을 열고 있는 권도연 작가가 연출한 장면은 유년 시절의 기억과 연결된다. 어린 시절, 작가의 아버지는 헌책방에서 사온 책들로 집 지하실에 작은 도서관을 꾸며줬다. 작가는 이곳을 자기만의 놀이터로 삼아 내밀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 홍수로 지하실이 침수되는 걸 목격했다. 물이 차오르고 빠져나가는 과정 속에서 뭉개지고 찢어지고 분해된 것은 단지 책만이 아니었다. 현실과 독립된 채 완벽한 문장들로 둘러싸인 작은 세계가 그의 눈앞에서 붕괴된 것이다.

 

작가는 시간이 한참 지나고 성장한 뒤에도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 기억(이미지)을 사진으로 불러온다. 도서관에서 기증받은 헌책에서 낱장을 분리해 나무선반 위에 배치하고, 물리적·화학적 처리를 거쳐 기억 속 이미지에 더 다가간다. 어제 속절없이 눈으로 지켜봐야 했던 장면을 이제 손으로 복원하는 과정은 스스로를 다시 자기만의 작은 세계에 인도하는 일일 것이다.

 

이 이미지는 과거의 기억과 얼마나 일치하느냐보다 현실에서 사라진 장면의 빈자리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빛난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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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앤드 파운드 프로젝트


표면이 지워지고 부식된 사진 속에 두 사람이 있다.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얼굴에는 코와 입이 지워졌고 눈만 간신히 보인다. 반대로, 다른 이는 눈 주위가 지워졌고 간신히 입만 보인다. 둘은 연인 사이일까, 아니면 부녀일까?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다정한 한때가 담긴 사진은 그들에겐 분명 소중한 추억일 것이다.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 피해지역에서 발견된 사진이다. 자원봉사자들이 재해 현장에서 사진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비록 망가진 사진이지만, 누군가의 추억이기에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사진을 주인에게 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로스트 앤드 파운드(Lost and Found)’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수집된 사진들은 오염물질을 제거하고, 디지털 카메라로 재촬영해 색인파일 시스템으로 만들어 검색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진의 주인을 찾아주는 게 프로젝트의 요지였고, 무려 1만9200장의 사진이 주인을 되찾았다. 대지진으로 무너진 건 집과 도로 등 물리적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쌓은 시간과 기억들도 함께 부서질 수밖에 없다. 모든 게 무너진 가운데 사진을 되찾는 일이 무슨 소용일까 싶다. 하지만 사진 한 장은 마법처럼 옛 기억 속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는다. 그 모든 것이 떠내려가도, 붙잡아야 할 소중한 추억이 사진 속에 있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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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고문 사건이 일어난 조사실 책상, 1986년, 경향신문사


책상 하나로도 꽉 찰 만큼 좁은 사무실, 창문에는 철창이 답답하게 둘러싸고 있다. 조금 삭막해 보이긴 해도 흔한 사무실의 모습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죽기보다 싫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지옥 같은 곳이기도 하다.

 

1986년 6월6일 새벽, 당시 대학생이었던 권인숙은 부천경찰서 조사실에서 성적으로 유린당했다. 부천시 지역의 노동운동에 가담해 ‘허명숙’이란 가명으로 위장취업했던 그녀는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혐의로 연행됐다. 그리고 사진 속 조사실에서 수갑에 묶인 채 문귀동 형사에게 매우 악질적인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이른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다.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녀는 정신을 차려 이 사실을 폭로했다. 문귀동을 강제 추행 혐의로 고소하고 검찰에 진상규명도 요구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어렵사리 용기를 낸 여성의 목소리가 우리 주위를 맴돈다.

 

 “나는 생애를 걸고 지구를 향해서 정당성을 주장한다.”

권인숙의 최후진술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목소리를 살뜰히 챙겨야 할 때다. 그러나 30년 전 검찰은 공식발표에서 “운동권이 성을 혁명의 도구화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지금의 미투 운동을 두고는 꽃뱀을 운운하는 이도 있다. 절박한 구조신호가 담긴 이 목소리에도 응답하지 못하는 세상이란 얼마나 엉망인 것인가.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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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인 풍경, 오키나와, 2016 ⓒ허란

 

눈동자에도 기억이 있는 걸까, 멀리 흐린 바다, 가까이 교복 입은 학생들. 바다와 교복만 눈에 스쳐도 왜 팽목항, 세월호가 보이는 걸까? 동공에서 호출된 기억은 일본 오키나와 바다를, 일본 학생들을 진도 앞바다로, 단원고 아이들로 둔갑시키고 만다. 망막에 각인된 기울어진 배는 더 이상 바다를 바다로 볼 수 없게 한다. 언제쯤 잃어버린 바다를, 침몰한 봄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

 

전시 중인 허란의 사진전 <꺾인 풍경>(류가헌·3월11일까지)은 제주 강정에서 밀양, 팽목항까지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던 눈동자의 기억을 따라간다. 아빠와 엄마가 싸울 때 딴청 부리며 예쁜 그림을 그리는 아이처럼, 작가는 아픈 풍경들 앞에서 딴 곳을 바라본다. 갈등이 첨예한 현장 속에서 찍힌 손톱 모양 초승달, 망아지 한 마리, 초록 나무 한 그루는 거짓말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안온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현실 회피적인 시선이라 여기거나 반대로 내면이 투영된 자기만의 시선이라 치켜세우는 일은 조급하며 둔탁하다. 고개를 돌리는 건, 회피나 투영을 떠나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사건의 중심부를 직시하며 오히려 현장의 어떤 치열함에 도취되거나 마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눈의 의지가 현실 회피가 될지 자기 투영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다만, 확실한 건 고개를 돌려도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대로이고, 풍경은 제자리일 뿐이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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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위에 불빛과 불빛이 서로 스치며 겹쳐진다. 오늘의 풍경 위에 어제의 풍경이 투사된다. 도로 위에서 서로 포개진 어둠과 불빛 그리고 풍경은 유령 이미지처럼 차원이 다른 시공간을 부유하면서 반짝거린다. 모든 존재들이 사라지기 직전에 발산하는 투명한 빛처럼.

 

조준용, 1996 동대문운동장 Ⅱ, 2016 갤러리룩스 제공

 

조준용의 사진연작 ‘4.9mb Seoulscape’은 바라보는 이들의 눈동자에 아득한 기분을 불어넣는다. 그 아득함은 투명한 불빛과 반투명한 이미지들이 중첩된 시각성에서, 그리고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동대문운동장의 희미한 그림자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강변북로, 올림픽대로, 내부순환로 등 서울의 9개 순환도로를 따라 이동하며 도로 한가운데에 사라진 서울의 풍경들을 빔프로젝터로 투사한 뒤 촬영했다. 어두운 허공에 쏘아올린 이미지는 1995년부터 서울시가 도시경관기록화 사업의 일환으로 구축한 ‘서울연구데이터 서비스’에서 찾았다. 이 사이트에 저장된 2만5000장의 사진은 모두 4.9mb 크기 이내로만 전송할 수 있다. 빨리 보내고 빨리 받을 수는 있겠지만, 과연 4.9mb의 사진 용량에 삼풍백화점처럼 비극적인 역사를, 동대문운동장에 얽힌 많은 추억을 충분히 저장(기억)할 수 있을까. 어쩌면 무엇인가 사라지고 생겨나는 속도보다 우리의 기억과 망각이 더 빠른 것은 아닐까. 압축성장의 눈부신 속도에 동기화된 우리의 기억은 불과 몇 년 전의 사진 앞에서 언제나 아득한 기분에 빠져들고 만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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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_두훈(BLUE), 2017 ⓒ이승주

 

짧은 머리에 양복 차림의 남자가 보인다. 뒤에는 고층빌딩과 버스 정류장, 바닥에는 보도블록이 보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보이는 건 콘크리트 교각과 강바닥의 크고 작은 돌뿐이다. 만약 회사들이 즐비한 강남의 테헤란로에서 그를 마주쳤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테헤란로에서 순간이동한 것처럼 한강에 뚝 떨어진 모습이 자꾸 눈길을 멈춰 세운다.

 

사진가 이승주는 오랜 친구인 ‘두훈’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 두훈의 직장과 멀지 않은 한강변이었다. 사진가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옷이나 소품을 준비하라고 주문했고, 모델은 파란색 넥타이와 짙은 남색 양복을 택했다. 이런 식으로 주변 지인들을 집이나 회사 근처 등에서 촬영한 사진연작 ‘A’에는 결과적으로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일상공간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블루, 레드, 옐로, 카메라 앞에서라도 히어로물의 주인공처럼 자기 고유의 색으로 변신하면 좋으련만, 스스로 선택한 파란 넥타이처럼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현실 속에서 이미 익명의 존재들 ‘A’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사진가는 친구들을 불러 그들의 독사진을, 전신상을 카메라에 당당하게 새긴다. 마치 변신을 앞둔 히어로의 모습처럼. 우뚝 선 두 다리, 불끈 쥔 두 주먹, 빳빳하게 쳐다보는 두 눈동자, 두훈은 친구의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 온몸에 힘을 주기 시작한다. 그들은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존재를 힘주어 바라본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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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수치심 때문에 죽는다.” 영화 &lt;디엣지&gt;의 대사다. ‘내가 왜 길을 잃은 거지? 뭘 잘못한 거지?’ 자책감과 자괴감에 빠지면 무기력해진다. 살기 위해서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다. 수치심 때문에 죽는다는 건 그런 의미일 것이다.

 

똥물을 맞은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 1978년 2월21일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닌가?” TV에서 8년간 자책감에 시달렸다는 이를 보았다. ‘수치심 때문에 죽는’ 것과 다를 바 없는 8년의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경직된 목소리는 40년 전 동일방직 노동자가 수치심을 견디며 부르쥔 주먹과 닮아 보였다.

 

1978년 2월21일, 대의원 회의를 앞두고 회사 측에 매수된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조합원들에게 달려들어 똥물을 뿌렸다. 이른바 ‘동일방직 똥물사건’, 남성 중심의 어용노조 대신 여성 중심의 민주적 노조로 탈바꿈하자 회사와 정부가 탄압했던 것이다.

 

“그래도 똥물을 먹고 살 순 없다.” 그럼에도 계속 저항했던 목소리는 절박했다.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8년 전의 성추행 피해를 고백한 목소리는 단단했다. 수치심 때문에 죽는 인간은, 다시 또 수치심을 겪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한다. 세상이 바뀌는 순간이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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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에 오른 카약, 2015년 1월31일 ⓒ이우기


하얀 별처럼 반짝이는 눈발이 까만 허공에 박힌다. 촘촘한 백성좌를 향해 분홍빛 카약이 몸을 일으킨다. 그러나 비계 파이프로 얼기설기 만든 망루에 얽힌 카약은 제자리에서 꼼짝 못한다. 좌초된 카약 대신 노란 깃발들이 거센 바람에 제 몸을 맡기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친다. “NO! NAVAL BASE(해군기지 반대!)”

 

3년 전, 허공에서 제자리를 맴돌던 카약에 조경철 강정마을회장을 비롯한 5명이 몸을 실었다.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제주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부지로 확정되고, 공사가 강행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엉성하고 위태로운 망루 꼭대기에 올라 자신의 몸을 쇠사슬로 묶으며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날 아침, 해군은 100여 명의 용역을 투입해 망루를 철거하는 행정 대집행을 시작했다. 용역들은 강정마을 주민, 시민단체 회원 등을 강제로 끌어냈다. 부상자들이 속출했지만 현장에 있던 경찰 1000여 명은 뒤에서 구경만 했다. 국민의 편에 서야 할 군경이 오히려 국민을 되돌아선 모습이 SNS에 전파되면서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그런가 하면, 연로한 강정 주민들은 뭍에서 온 많은 경찰을 바라보며 제주의 오래된 악몽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날 새벽, 폭풍전야의 어두운 긴장감 사이로 무심한 눈발이 또다시 흩날렸다. 아주 오래된 어제와 곧 밝아올 내일까지 이어지는 제주의 신음 또한 차가운 눈처럼 쌓여 녹을 줄 몰랐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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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

종이에 연필 (20x20cm)


요즘 반려 동물들을 많이 키웁니다. 그중에 애교 많고, 대소변 잘 가리고, 공간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고 키울 수 있는 고양이가 가장 인기가 많은 듯합니다. 온라인상에는 고양이 이미지들이 가득하고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들이 달립니다. 그러나 차가운 현실에서는 길 고양이들이 힘겹게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어젯밤 아직 엔진 열기가 남아 있는 차 밑에 있는 아기 고양이를 보았습니다. 현실에선 사람이나 동물이나 여전히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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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 4구역 남일당 빌딩 망루, 2010년 ⓒ노순택

 

21그램. 영혼의 무게로 불린다. 임종 직전과 직후에 그만큼의 몸무게가 차이나는 탓이다. 서울 용산 4구역 남일당의 부서진 망루 주변에 하얀 연기가 나타난 노순택의 사진을 보며 떠올린 것은 영혼의 무게였다. 쪼그라든 망루에서 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21그램은 5센트 5개의 무게, 벌새 한 마리의 무게, 초코바 하나의 무게와 같다. 그렇다면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 그들의 영혼은 5센트 30개, 초코바 6개의 무게와 같을까.

 

2009년 1월20일 새벽 서울 용산, 재개발 보상대책에 반발한 철거민들이 남일당 건물을 점거한 채 경찰과 대치했다. 진압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했다. 경악스러운 대참사였지만, 누군가 쫓겨나는 장면은 그 어디선가 늘 되풀이되는 일이기도 했다. 2009년의 용산참사는 1970년대 도시 빈민층의 삶을 다룬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 속의 한 대목과 겹쳐진다. 1980년대 서울 올림픽이 예정되면서 강제 이주되는 철거민 세입자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1988)의 한 장면과 닮았다. 그제 평창 올림픽 가는 길목의 낙후지역이 부끄럽다며 가림막을 하자는 신문 기사를 보며, 70년대부터 오늘까지 누군가의 삶을 가리거나 철거하는 사회에서 영혼의 무게는 과연 얼마인지 의문이 들었다. 초코바 1개보다도 가볍게 다뤄지는 건 아닌가.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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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순한 아이는 없다.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그것뿐이다. 모든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예민함을 지녔고, 각자의 방식으로 그 예민함을 표출한다. 이 아이는 소리에 예민해 소리를 지르고, 저 아이는 잠자리에 예민해 잠투정하며, 또 어떤 아이는 음식에 예민해 음식을 뱉는다. 어쩌면 그래서 더 힘주어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는 순하다고, 착하다고.

 

그래, 눈물은 원래 들리지 않는 법이다. ⓒ이옥토

 

그러나 각자 타고난 예민함은 달큰한 말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나이를 먹고도 마냥 아이처럼 유난스럽게 예민함을 티낼 수 없기에 스스로 자신을 억누르는 요령이 생길 뿐이다. 소리 없이 울거나 억누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내면에 잔존할 것이다.

 

젊은 작업자 이옥토의 사진을 보면서 그런 종류의 예민함을 헤아려본다. 사진 속에 자주 등장하는 미약한 빛과 유약한 형체들 그리고 연약한 색은 극도로 예민하게 바라볼 때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그런 예민함으로만 감지되는 또 다른 세상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귓바퀴에 고인 들리지 않는 눈물처럼. 그런 세상을 예민한 눈으로 바라보는 건, 예민한 만큼 상처를 얻은 자기 자신과 전력으로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예민함도, 그 상처도 모두 결국 자기 자신이니까.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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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는 별금당이라고 적힌 장바구니를, 허리에는 포대기를 한 여인이 서 있다. 그 옆에는 예닐곱 살 아이가 영화 <끝없는 사랑>의 포스터 속 키스 장면에 정신이 팔려 있다. 오른쪽에 버스 정류장 표지판인 것 같은 쇠기둥이 보인다. 두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으로 짐작되는 여인의 얼굴에는 오늘의 고단한 외출이 그대로 묻어 있다.

 

엄마는 24시간, 경남 마산, 1983년 ⓒ권태균

 

어디 오늘뿐이었을까. 어제도 내일도 두 아이를 챙기며 생활을 꾸려야 하는 엄마의 무게가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함석판에 붙은 영화 포스터 속 여인의 웃음은 엄마의 검은 얼굴을 더욱 수척하게 만든다. 그 절묘한 대비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사진가(고 권태균)는 놓치지 않고 화면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결코 영화 제목처럼 ‘나인 투 파이브’할 수 없는, 끝내 퇴근이 없었던 여인의 삶을 사진 제목 ‘엄마는 24시간’으로 간명하게 표현했다.

 

그럼, 30여 년이 지난 요즘 엄마의 삶은 좀 나아졌을까. 노키즈존이 어른 전용 공간을 위한 대책이기보다 이른바 ‘맘충이 방치한 아이들’에 대한 비난으로 작용할 때, 그 안에 아이의 행동거지에 대한 책임이 모두 엄마의 인격으로 연동될 때, 여전히 ‘엄마는 24시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식당에 들어서면 아내와 아이를 나란히 앉힌다. 아이의 밥은 엄마가 챙긴다고 몸에 밴 것이다. ‘엄마는 24시간’일 수밖에 없는 건, 아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연장전을 치르기 때문일 것이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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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장면을 파악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차근차근 보아도 잘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화환과 향, 병풍이 있는 영안실은 왜 난장판이 됐을까. 도대체 무슨 연유로 벽에 구멍까지 뚫린 것일까.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씨의 영안실 벽에 뚫린 구멍, 1991년, 경향신문사

 

1991년 5월7일, 의문사를 당한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의 영안실에 백골단이 침입했다. 그들은 물대포를 쏘아대며 시신 사수대를 폭행했고, 해머로 벽을 뚫어 시신을 탈취해 강제로 부검했다. 이러한 정보를 얻은 후에도 사진은 여전히 비현실적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 담겼기 때문이다.

 

최근 아이돌 스타의 자살 그리고 제천 화재 참사를 둘러싼 몇몇 보도를 접하며, 구멍 뚫린 영안실의 풍경이 떠올랐다. 아이돌 스타의 비극적 죽음을 다루는 기사는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고 집요했다. 유서부터 자살 방법, 당일 행적 그리고 심리 상태와 친분 관계까지 모두 낱낱이 공개될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공인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죽은 이와 유가족을 위한 배려가 없다는 면에서 ‘클릭 장사’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한편 KTV 국민방송에서는 제천 화재 참사를 홈쇼핑 방송 형식으로 전달했다. 원래부터 ‘홈쇼핑’ 형식의 차용이 해당 방송의 설정이라고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음을 둘러싸고 망자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만큼 미개한 일은 없다. 한 인간의 죽음을 다루는 우리의 태도와 방식에는 여전히 깊은 구멍이 뚫려 있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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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과 거실로 이어지는 자리에 엄마가 앉아 있다. 엄마의 무릎을 베고 큰아들이 누워 있다. 엄마의 손은 아들의 가슴 위에 살포시 놓여 있고, 두 사람의 단단한 입매가 서로 닮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응시하는 엄마의 얼굴에도, 눈을 지그시 감은 아들의 얼굴에도 청량한 빛이 은은하게 감돈다.

 

 

찬란 - 유예에서 바라봄으로 ⓒ박현성

사진가 박현성의 ‘찬란’ 시리즈는 어머니와 형의 일상을 따라간다. 꽤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진을 면밀히 바라보면서 연출된 장면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중년의 엄마와 청년의 아들 사이에서 무릎베개가 왠지 흔치 않은 일인 것 같고, 두 얼굴을 감싸는 빛의 기울기가 우연이라 하기엔 절묘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작업이 가족을 향한 기록이기에 앞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족 사이에 솟아난 공백을 더듬는 몸짓이기에 그렇다.

아버지를 잃은 엄마와 형 그리고 ‘나’는 카메라 주위에 모인다.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엄마와 형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일이 자연스러워지는 만큼 작은아들 그리고 동생의 카메라 앞에 서는 일도 익숙해진다. 얼굴이 닮은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또 아버지의 빈 그림자도 발견할 것이다.

 

말해질 수 없는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망자는 떠나도 살아남은 이들의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가족의 생 앞에 렌즈를 밀어 넣은 작가는 미약하지만 찬란한 빛을 보고야 만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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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14일, 보안사령부에서 군인들이 카메라 앞에 도열했다. 12·12 쿠데타의 주역들,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촬영 이틀 전 정권을 찬탈했다.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한 그들은 자축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만의 영광은 사진으로 기념됐다.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안되기에 뒷줄 맨 우측의 백운택 준장은 따로 편집해 붙이기까지 했다. 

 

1979년 12월14일, 신군부의 기념촬영(위)/1996년 12월16일, 12·12 및 5·18 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아래).

 

1996년 12월16일, 그들은 서울고등법원 법정에서 다시 카메라 앞에 도열했다. 흑백사진에서 앞줄 중앙에 보였던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등은 컬러사진에서도 역시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했다. 군복 대신 수감복을 입고, 별 대신 번호표를 단 주역들의 모습은 늙고 지쳐 보인다. 그들만의 굴욕이 찍히는 순간, 그들만의 영광 때문에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는 걸 반성이라도 했을까.

 

12·12 및 5·18 사건 1심 선거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됐던 전두환은 1997년 12월에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들만의 굴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주역들이 목숨을 걸었던 쿠데타의 성공은 또 한번 그들을 살려준 것이다. 그들만의 영광을 묵인한 슬픈 현실은 얼마나 굴욕적인가. 14일과 16일 사이, 그들만의 또는 우리의 영광과 굴욕이 카메라 앞에 교차로 도열했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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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의 한 장면.


젊은 남녀가 등장하는 통속적인 영화는 대개 떠들기 마련이다. 두 사람이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디서 첫 키스를 했는지, 언제 사랑이 식기 시작했는지, 무엇 때문에 헤어졌는지 그 시작과 끝을 낱낱이 이야기하기 바쁘다. 그러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영화에는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시게루와 듣지 못하는 다카코가 등장하기에 대사가 거의 없다. 게다가 감독은 두 남녀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말하는 대신 곁에서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작정한 것 같다. 함께 서핑보드를 들고 가는 둘의 모습을, 시게루가 서핑하는 동안 해변에 남아 그의 옷을 개는 다카코를, 그녀의 집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게루를 떨어져서 보여줄 뿐이다.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시점은, 이 세상에서 오직 둘만 아는 이야기를 대신 떠들 수 없다고, 타인의 삶과 사랑을 속속들이 헤집어 볼 수는 없다고 역설하는 건 아닐까.

 

그 흔하디흔한 섹스신 하나 없이, 끝날 때까지 손잡는 장면조차 나오지 않는 영화는 그동안 타인의 삶과 사랑에서 어디까지 듣고 보며 지냈는지 자문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게루는 어느 날 갑자기 바다에서 사라지고, 다카코는 남자친구가 남긴 서핑보드에 둘의 기념사진을 붙여 바다로 흘려보낸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기념사진은 두 사람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할 순 없지만, 이 세상에서 오직 둘만 아는 이야기가 존재했단 걸 기억한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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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이한열 열사(왼쪽)와 어머니 배은심 여사, 1986년,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얘야, 사진 한 장 찍자”고 했을까, 아니면 “엄마, 사진 찍어요” 했을까?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가을 햇볕이 환해서, 노란 국화가 탐스러워서 카메라 앞에 섰을 것 같다. 사진 찍고 싶을 만큼 햇살이 좋았던, 국화가 예뻤던 그날은 두 사람의 소박한 모습으로 동결된다.

 

어찌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기념사진이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구석이 있다. 저기 해맑게 웃는 청년이 바로 이한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한열 열사가 저리도 예쁘게 웃는 아이였단 말인가. 내가 사진으로 기억하는 이한열은 1987년 6월9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이종창에게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모습뿐이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처럼 어떤 사진이 누군가를 기억하는 대표 이미지가 될 때, 그 사진은 강력한 기억의 수단이지만 동시에 망각의 도구가 된다. 하나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고, 다른 이미지들은 서서히 지워지거나 그 존재를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장의 사진을 보며 정작 확인할 것은 프레임 안에 보이는 기억뿐만 아니라 프레임 밖에 숨겨진 망각의 빈자리이다.

 

문득,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무척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생때같은 아이를 하루아침에 잃는 것도 그렇지만, 저리도 웃는 게 예쁜 아이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으로만 기억되는 일은 얼마나 억울할까.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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