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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

번개, 번뜩이는 영감 장마철의 하이라이트는 천둥과 번개다. 사람들은 자연의 이 현상을 흥분보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바라본다. 마치 신의 분노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천둥 번개를 흥미롭게 바라본 예술가가 있다. 미국의 대지 미술가 월터 드 마리아! 그는 번개를 하늘이 그려내는 멋진 드로잉으로 격상시켰다. 그것도 매번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절대로 소유 불가능한 작품으로! 1970년대 월터 드 마리아는 뉴멕시코주의 광활한 사막 들판에 길이 1.6㎞, 폭 1㎞에 7m 높이의 스테인리스 스틸 봉 400개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사각형 모양으로 설치하였다. 이 피뢰침은 의도적으로 번개를 유도하는 것으로 비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번개의 섬광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뉴멕시코 디아 뉴욕미술센터의 후원 아래 영구적으로 전시 보존되고 .. 더보기
플랜테이션 백인들을 위한 식민지풍의 저택. 그 주변으로는 광활한 농장이 펼쳐져 있다. 역시나 햇볕은 따갑다. 식민지 시절, 그 뜨거움 아래서 자라나는 농작물들에 대한 욕망과 그 뜨거움에 익숙한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열기는 아마 더 강렬했으리라. 작품 속에서 시대와 장소를 짐작할 만한 단서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 켄터키인지, 쿠바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사탕수수 농장인지 알 도리가 없다. 그곳이 어디이건 플랜테이션 개발에 혈안이 됐던 백인 지배 아래의 원주민들의 상황은 아마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은 직설적으로 이 모든 것을 얘기하는 대신 궁금증 가득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흑인, 태양열 아래서 무심하게 자라는 식물들 혹은 그 위로 피워 오르는 화염처럼 뭔가 사.. 더보기
해변의 칠리다 “예술은 자연을 형이상학적으로 보충하는 것이다.” 니체의 이 말을 십분 이해하게 하는 예술가가 있다. 스페인의 조각가 에두아르도 칠리다(1924-2002). 내 서재에 아무렇지도 않게 걸려 있는 복사된 칠리다의 작품사진 몇 점. 나는 자주 나에게 부과된 예술가의 작품을 두고두고 좀 오래 지켜보는 편이다. 대부분 그쪽에서 말을 먼저 걸어주기를 기다리면서, 조금은 갈망하는 시선을 보낸다. 스페인 바스크 해안가에는 칠리다의 ‘바람의 빗 Wind Comb’(1977년)이 서 있다. 서로 다른 위치에 세 점의 조각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바위에서 솟아나온 촉수 같기도 하고, 바닷물을 삼키는 혀 같기도 하며, 폭풍의 잔인함에 묵직하게 대응하고 있는 수호신 같기도 하다. 돌과 쇠의 만남 혹은 접촉! 어쩌면 그것은 태곳.. 더보기
애송이의 여행 이 사진을 처음 보면 두 번 놀란다. 우선 작가가 직접 접은 사진 속 종이들이 너무 작아서 놀라고, 그렇게 작은데도 기관을 갖춘 생명체처럼 정교해서 또 한 번 놀란다. 하물며 전시장에 들어서면 작품 크기도 작다. 큼지막하고 화려한 작품들이 유행처럼 번지는 요즘, 전시장에 걸린 모노톤의 자그마한 사진들은 애초 벽과 한 몸이었던 것처럼 잔잔한 존재감만을 발한다. 그래서 오히려 액자 가까이 고개를 바짝 디밀어야 하고, 숨은 그림 찾듯 작은 대상들 앞에서 더 긴 시간을 머물러야만 한다. 그렇게 우리의 둔한 감각이 깨어나는 사이, 책장의 펄럭임을 타고 활자 속에서 튀어나온 종이비행기들은 사진 밖으로 가벼운 비상을 시도한다. 순간 종이비행기가 일으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까지를 느낀 것 같기도 하다. 사진가 권도.. 더보기
[유경희의 아트살롱]‘낙원추방’과 요절한 화가 마사치오 쫓겨난 이들의 비참한 심경을 이렇게도 침통하게 표현한 그림이 있을까? 창세기 3장 8-24절에 따르면, 하느님은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인간에게 판결을 내린다. 여자에게는 출산의 고통과 남편에의 종속을, 남자에게는 노동의 형벌을 명한다. 하느님은 천사인 케루빔에게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는 일을 맡겼고, 케루빔은 불칼을 들고 그들을 쫓아내며 성스러운 장소를 지키고 있다. 1425년 마사치오는 피렌체의 실크 상인 브란카치 가문의 가족 예배당을 위해 ‘낙원추방’을 그렸다.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슬퍼하는 아담과 허공을 응시하며 넋이 나간 이브의 표정은 진정 압권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브의 포즈는 마치 비너스가 취하는 ‘비너스 푸디카(정숙한 비너스)’라는 자세를 취하고 있기까지 하다. 비너스와 이브가.. 더보기
점들 정교하고 화려하게 정렬한 이 점들의 정체는 과연 뭘까. 눈이나 볼에 바르는 색조 화장품 내지는 디자이너를 위한 컬러 차트, 아니면 디지털 이미지를 확대한 픽셀들? 답은 조금 더 시시하다. 바로 문구점에서 파는 땡땡이 스티커. 사진가 황규태는 이 스티커를 근접 촬영한 뒤 컴퓨터로 색을 조작했다. 그러나 3m 크기의 프린트로 보는 그의 점들은 손바닥만한 스티커와는 달리 도발적이다. 가볍지만 싼 티 나지 않고,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칠순을 넘긴 황규태는 여전히 파격적인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는 사진계의 이단아다. 그는 미국에서 생활하던 1960년대, 팝아트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진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디지털이 나오기 훨씬 전인 그때부터 필름의 어느 부분만을 확대해서 재촬영하거나 필름을.. 더보기
줄리어스 시저와 로마 초상조각 7월이다. 줄라이(July)는 줄리어스 시저(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희대의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따왔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저”와 같은 간단명료한 언어 속에 모든 것을 담아낸 정치예술가 줄리어스 시저! 영어단어 시저(Caesar)는 독일에서는 카이저(kaiser), 러시아에서는 차르(czar)라고 하며, 모두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황제 중에서도 실권을 장악한 무소불위의 독재적인 전제군주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결국 절대적인 힘을 가진 황제를 뜻하는 시저라는 단어가 줄리어스 시저에서 비롯됐다는 말이다. 실제로 줄리어스 시저는 황제가 아니었다. 황제나 왕은 아니었으나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한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가,.. 더보기
코피노 흙먼지가 날리는 버스 창가에 앉은 여자도, 소녀도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몸이 불편해 보이는 이 아이는 코피노다. 코피노는 한국인 남성과 필리핀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가리킨다. 이 아이들의 대부분은 유학이나 여행, 사업차 필리핀에 머물던 남성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뒤, 아빠에게서 버려진다.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는 낙태가 불법이다. 소녀가 배 속에 있을 때 이미 아빠는 도망쳐 버린 상태였다. 엄마는 뒷감당이 두려워 다양한 방법으로 사산을 시도했다. 계단을 심하게 오르내리거나 배를 심하게 치는 것은 물론이고 독한 술을 마셨다. 그 충격은 아이의 생명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으나 뇌 기능의 상당 부분을 마비시켰다. 심지어 친엄마마저 혼자서는 앉지도, 서지도, 먹지도 못하는 이 아이를 떠나버렸.. 더보기
마그리트의 거대한 나날들 그림은 보는 사람에 따라 수만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한들 무슨 상관있겠는가! 작품은 하나의 생명체이고, 그림은 그것을 그린 화가와는 무관하게 자기만의 운명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 그림으로 철학을 한다고 여겼던 르네 마그리트의 ‘거대한 나날들’ 역시 내게는 그런 작품이었다. 그림 속 여성은 거대한 공포상태에 빠져 있고, 남자를 힘껏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그 남자는 몸의 일부를 점령해버렸다. 마그리트는 이 작품이 한 여인을 강간하려는 장면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 여인을 사로잡은 공포를 일종의 시각적 속임수를 통해 포착하려 했다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화가 가운데서도 마그리트의 그림만큼 비밀스러운 요소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지속적으.. 더보기
괴물들이 사는 나라 지방이라는 말 앞에서는 괜히 목울대가 촉촉해진다. 이 표현 자체가 서울을 기준으로 한 분류일 터이므로 어쩔 수 없이 중앙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비운의 느낌을 풍기는 탓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 대도시보다는 낙후된 이곳은 주5일제 이후로 화려한 아웃도어 복장으로 치장한 도회지 사람들이 다녀가는 펜션이나 캠핑장의 주 무대라는 뜻으로도 통한다. 그 지방이 한때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힘을 쏟은 것이 캐릭터 사업이다. 금산에서는 인삼이, 안흥에서는 찐빵이, 단양에서는 온달과 평강 등이 지역을 대표하는 식이다. 자신들만의 특산물이나 전통을 전국에 널리 알려 더 이상 서울의 변방이 아님을 선언하기 위함이니 이 캐릭터가 가지는 역할은 꽤 묵직하다. 그렇다고 이 무게감이 물리적 크기와 비례하는 것은 아닐 텐.. 더보기
웃음 축구 골대에 휘장처럼 커다란 천을 두른다. 2.5m 정도의 골대 높이를 넘길 수 있는 천은 그 자체로도 꽤 무겁고 크다. 한쪽 골대에는 검은색, 맞은편에는 흰색 천이 둘러진다. 천에는 구멍들이 여러 개 나있다. 이제 당신은 이 무대에 초대받은 손님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원하는 색깔의 천으로 가서 원하는 구멍에 손과 얼굴을 내밀면 된다. 그리고 웃는다. 다만 진심으로 웃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요구다. 도대체 나는 언제 어떤 이유로 웃었던가. 해는 중천에 떠서 스포트라이트처럼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마치 소설 의 뫼르소에게 쏟아지는 태양처럼. 원치 않아도 선택한 무대에 서면 눈부신 태양과 마주하게 되어 있다. 그 태양 아래에서 내 웃음의 기억 혹은 웃음이라는 행위 자체와 마주한다. 태양.. 더보기
내가 제일 잘나가! 루소의 새 발견 앙리 루소는 미술사상 가장 특이한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세관원 출신의 그는 세관원이라는 뜻의 ‘두아니에(Le Douanier)’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렇지만 그의 업무는 거창한 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센강을 타고 올라온 상선들에 통행료를 징수하는 단순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이처럼 세관원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그리던 루소는 40세경 작업실을 마련하고 공식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49세가 되어서야 전업화가의 길을 걷기 위해 22년간 몸담았던 세관을 떠나게 된다. 이렇듯 정식으로 미술대학을 나온 적도,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도 없었던 일요화가회 출신의 루소는 자신을 아주 위대한 화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후배였던 피카소와 자신만이 당대 최고의 화가라고 말했을 만큼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루소의.. 더보기
밀양 부끄럽게도 그곳에 한번도 다녀오지 못했다. 다녀온 이들의 말과 사진을 통해 풍문처럼 듣고 보았을 뿐이다. 처음부터 가장 생경했던 건 풍문의 주인공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사실이었다. 자식 다 키워 타지로 떠나보내고, 밭에서 나고 자란 것들만으로도 살림이 충분한 어르신들이 아쉬울 게 뭐가 있을까. 그저 사는 날까지 자식들 병수발이나 시키지 않게 건강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 말고는. 그렇게 더 바랄 게 없는 분들이 겨울철 아랫목을 마다하고, 봄날 파종도 미루고 그야말로 사생결단으로 뭔가를 반대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몸이 쑤시는 날조차도 습관처럼 그냥 아까워서 100W짜리 전기장판도 두어 번은 망설이다 켰을 이분들한테 765㎸짜리 송전탑을 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까무러칠 일이다. 단순히 누군가의.. 더보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키냐르 “갈망된 시선은 눈꺼풀을 반쯤 내린다. 나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들을, 그 놀란 듯한 정중함을 좋아했다. 오직 이곳만을 보고 있지 않은 눈. 예전 세계에 중독된 얼굴들. 두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동시대가 아닌 눈. 반쯤 감은 눈. 포식한 사자의 눈. M과 함께 우리는 1997년 여름 반쯤 감은 이 놀라운 눈꺼풀들을 조사하러 갔다. 그것들은 마치 보이는 것을 가리기 주저하는 동시에 드러내지도 않으려고 주저하는 베일, 인간의 두꺼운 피부에 씌워진 매끄럽고 희미한 베일들 같았다.”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의 의 부분이다. 자전적이면서 문헌학적인, 소설 같지 않은 이 소설을 만났던 경험은 전율 그 자체였다. 그리고 지난 여름 나는 L과 함께 키냐르의 길을 따라갔다. 바로 이탈리아의 아레초로 향했던 .. 더보기
두아노의 아이들 조례시간이라는데 선생님은 아직 본격적인 ‘잔소리’를 시작하지 않은 걸까. 같은 곳을 보고 있는 녀석이 하나도 없는 이 교실은 그야말로 개성이 넘친다. 저기 맨 끝줄 명당자리를 차지한 놈은 익숙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그 앞줄로는 빠져서는 안되는 교실 풍경을 완성하듯 뒤를 향해 아예 몸을 젖힌 녀석도 있다. 물론 압권은 사진 속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소년이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지 미간까지 찌푸린 채 눈은 천장을 뚫을 기세다. 사진 찍는 이방인을 의식하고 있는 건, 그 대각선 뒤편으로 앉은 아이가 유일하다. 이 아이는 나중에라도 카메라를 든 아저씨가 로베르 두아노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그는 외젠 아제, 카르티에 브레송, 윌리 호니스 등 파리를 더욱 매력적으로 기억하게 만든 사진가들의 계보에.. 더보기
월계관에 숨겨진 비밀 아폴론이 월계수로 만든 관을 쓴 이유는 순전히 한 여자 덕분(?)이다. 첫사랑의 여자 다프네! 사실 그리스 신화 최고의 미남 아폴론은 사랑의 아픔이 많은 남신이다. 게다가 첫사랑의 실패는 순전히 올림포스 신궁의 꼬마 악동인 에로스 때문이었다. 신도 사랑에는 속수무책인 거다. 아폴론이 사랑의 신 에로스를 만나 그의 활솜씨를 조롱했다. 장난감 같은 화살로 무얼 하겠느냐며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에로스는 아폴론에게 황금 화살을 쏘아 아름다운 요정 다프네를 사랑하게 만들고, 다프네에게는 미움의 납화살을 쏘았다. 화살에 맞는 순간, 아폴론은 하필이면 남자에겐 도통 관심이 없는 선머슴 같은 다프네에게 반하여 끈질기게 구애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대로 다프네는 아폴론을 미워하고 피해 다녀야 할 운명이 .. 더보기
꿈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이곳과 이 장면이 왠지 익숙하다. 사진 속 그는 길을 잃어버린 나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누구인 것 같기도 하다. 정확하게 어딘지, 누구인지를 가늠할 수 없는 몽환적인 풍경은 답답하고 불안하면서도 음울하다. 들여다볼수록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궁금해서 자꾸만 기억을 더듬게 만드는 이 묘한 끌림은 마치 꿈속 같다. 수잔 번스타인(Susan Burnstine)은 사진으로 꿈의 세계를 묘사하는 사진가다.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카메라도 손수 제작한다. 잡동사니 플라스틱 상자에 중고 카메라 부속품을 고무로 연결한 이 수동 카메라는 너무 단순해,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무려 스물한 대의 카메라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렌즈의 초점은 잘 맞지 않.. 더보기
200년 전의 세월호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인 1816년 7월2일, 프랑스의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전 국민은 분노했다. 자격도 갖추지 않은 채 왕실의 연줄로 선장이 된 사람으로 인해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메두사호는 당시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세네갈로 향하던 길이었다. 자국의 군인들과 이주민 등 400여명을 태운 이 배가 침몰하자 선장과 고급 선원 등 250명은 구명보트를 타고 떠났고, 나머지 하급 선원과 승객 등 149명은 급조된 뗏목을 타고 표류했다. 12일에 걸친 표류 끝에 작은 범선 아르귀스호에 의해 구조되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5명뿐이었다.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는 사회적 화제가 된 이 사건을 그림으로 구상한다. 실제로 그는 난파선의 뗏목 모형을 .. 더보기
아버지와 아버지의 젊은 내가 나이 든 나를 안고 있다. 과거의 내가 어느 날 지금의 나를 찾아와 성모마리아가 그 아들을 품듯이 지그시 안아준다면,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있을까. 나의 모든 지난 행적과 망설임을 알고 있는 나의 과거에는 굳이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이 그냥 흐느끼기만 해도 될 것이다. 어쩌면 가까운 이들에 대한 집착은 이렇게 온전히 나를 이해할 또 다른 분신에 대한 갈증 때문에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와 다르듯이, 그 누구도 내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결핍과 외로움과 집착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젊은 작가 조니 브리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뜬 탈을 쓴 채 아버지를 안고 있다. 사진 속에서 그는 젊었을 때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그 자신이기도 하며, 스스로 아버지가 된 미래의 모습이기.. 더보기
죽은 동물에 대한 예의 데미언 허스트의 박제된 상어 이전에 죽은 짐승을 그린 그림이 있었을까? 본격적으로 죽은 사냥물 그림이 그려진 곳은 1650년대 이후 남부 네덜란드였다. 죽은 사냥감을 그린 그림의 특징은 바로 그 압도적인 크기와 실제처럼 보이는 트롱프뢰이유(눈속임그림)에 있었다. 따라서 이런 그림은 작은 주택에는 걸맞지 않고, 성이나 저택의 중앙홀에 걸려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잠시나마 진짜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사냥은 왕과 귀족, 기사의 품위에 걸맞은 취미활동으로 근본적으로 특권계층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림은? 원래 사냥감 정물화도 사냥처럼 왕족과 귀족을 위한 그림이었지만, 상류 부르주아들이 앞다투어 구매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대개 사냥에 대한 취향을 가지기에는 교양적,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던 부르주아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