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 소환 썸네일형 리스트형 이름을 갖지 못한 기억 사슴이 숨어 있다고 전해지던 한 부락 마을을 사람들은 ‘녹은(鹿隱)’이라 불렀다. 신화 속에서 지상과 천상을 매개하는 신령스러운 영매이자 영생, 재생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사슴이 숨어 사는 곳이니, 그 마을의 기운은 상상 가능하다. 마을이 이름을 잃은 것은 일제강점기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노근(老斤)으로 개명당했다. ‘녹은’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름을 빼앗긴 마을에도 일상은 흘렀다. 앞으로는 서송원천이 흐르고 주변을 산들이 둘러싼 전형적인 농촌 마을 사람들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터였다. 일상이 어그러진 것은 전쟁의 폭력성 때문이었다. 1950년 전쟁을 피해 길 떠나던 이들, 굴 속에 대피해 있던 사람들을 향해 미군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았다. 300여명이 살해당했다. 당시 미.. 더보기 정복 이것은 정복에 대한 이야기, 정복욕에 대한 이야기다. 김웅현은 해마다 새해 결심을 하듯 산에 다녀왔다. 등산을 즐기는 그가 관련 서적에서 발견한 일종의 기념화 ‘체르마트 클럽룸’에는 알피니즘의 황금기에 활약한 산 악인 18명이 그려져 있었다. 한 장의 이미지 속에서 그는 숭고한 도전정신을 발휘해 목숨 건 사투 끝에 산을 정복한 이들의 쾌감을 마주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위험하다고 해도 오늘의 산행은 레포츠 정도의 무게감을 가질 뿐이다. 작가는 정복에 대한 역사적 위상과 대상이 변한 것을 알았다. 그는 등반뿐 아니라 세계대전, 산업개발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흔적들을 조사하면서 ‘정복’이라는 행위를 시대에 따라 다른 형식을 갖추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각적 .. 더보기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모든 인간은 늘 아주 단순한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그 두려움을 무대에 올린다. 1974년 그는 미술관 중앙에 섰다. 옆에는 72개의 사물을 올려놓은 탁자가 있었다. 작가는 관객이 마음껏 그 사물 가운데 무엇이든 선택하여 작가에게 어떤 행위든 할 수 있도록 했다. 처음 관객은 물을 선택하고, 꽃을 선택해 작가에게 전해주었지만 이내 가위로 옷을 자르고, 가시로 몸을 찌르고, 칼로 목을 베고, 피를 마시는 가혹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고향인 베오그라드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간 그는 울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작가 우베 라이지펜을 만났다. 곧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함께 ‘관계의 에너지’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했다. 울라이가 아브라모비치의 가슴을 향해 활시.. 더보기 제목 없는 자유 - 5월 6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억의 잔상, 평소 누적된 상념의 부스러기는 그림이 될 수 있다. 동일한 장소에서라도 사람마다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기억을 쌓을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이들의 기억 간에는 조금의 연관관계도 필요 없다. 내면세계라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도 없고, 말해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그 세계를 일단 꺼내 놓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 왜 꺼내 놓으려고 하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겠다. 그 세계는 말하지 못하는 것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인지, 의미를 전하는 것인지 숨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비언어적 사유의 세계다. 그곳이 바로 화가 샌정이 화폭에 담는 세계다. 형태를 그리고 지우기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통해 경험은 누적되고 감정은 감추어지고 의미는 .. 더보기 ‘낙원의 가족’ 낙원을 상상하는 일은 시공을 초월한 전 인류의 유희거리였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 속에 전해오는 낙원에 대한 이야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보면 ‘아무런 괴로움이나 고통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이라는 이상세계를 꿈꾸는 일은 인간이 현생을 이어갈 수 있는 일종의 동력일 수도 있겠다. 낙원을 다룬 대표적 소설 가운데 도연명이 남긴 에는 전란을 피해 산속 깊이 숨어든 유민이 등장한다. 물고기를 잡으러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다 길을 잃은 어부가 흐드러지게 핀 복숭아 꽃길을 따라 정처없이 노를 젓던 중 한 마을을 만난다. 잘 가꾸어진 풍요로운 그 마을에, 혼잡한 세상을 등지고 산속 깊이 들어와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는 유민들이 있었다. 도연명은 전란과 군벌항쟁의 세파 등 극심한 정치적 혼.. 더보기 ‘심점환, 바다에 누워2’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뭍에 올라온 물고기는 재물을 약탈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감시자 역할을 하느라 반닫이며 뒤주의 자물통에 새겨졌다. 불가에서 물고기는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채 나태와 방일에 빠진 수행자에게 경각심을 주는 존재다. 물고기는 목탁이 되어 구도자의 타락을 방지한다. 불가에서 물고기의 상징은 중생을 생각하는 부처의 자비, 장애가 없이 자유로운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로까지 이어진다. 신라 실성왕 15년 3월, 동해변에서 뿔 달린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해 5월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솟구쳤다. 이듬해 5월 왕이 죽었다. 백제 의자왕 19년 5월에는 사비하에서 길이가 30척이나 되는 큰 물고기가 죽어서 떠올랐다. 이듬해 백제는 망했다. 물고기가 죽고나면 누군가의 세상은 사라졌다... 더보기 ‘귀가 막혀’ “악마를 만든 자.” 이는 ‘죄악에 물든 타락한 일상’을 무덤덤하게 살아내는 인간을 향해 악마 가득한 지옥그림을 내놓아 경종을 울린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 추정)의 별명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를 주제로 작업한 그는 환상적인 이미지와 기묘한 상징성이 어우러진 화풍으로 오늘날까지 주목받고 있다. 그가 묘사한 왜곡된 신체, 동물과 벌레, 인간을 혼종한 군상은 그로테스크한 정서를 견인하면서 인간세계의 죄악을 풍자하고, 세기말 특유의 염세적 세계관을 분출한다. 그의 화면은 천재지변, 전염병, 전쟁, 반란 등 역경의 14세기를 겪은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닿아 있는데, 이들에게 세상은 부도덕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섭고 추한 곳이었다. 그 시대 몇몇 사람들은 1500년 세상.. 더보기 붉은 발과 성소수자 이번주 내내 낙원동에는 ‘낙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잊지 마세요. 5월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입니다’라고 적힌 분홍색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질병으로 취급했던 동성애를 1990년 5월17일에야 비로소 질병 분류에서 삭제했고, 2004년 5월17일 미국 최초로 매사추세츠주가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 이 의미 깊은 날은 라는 책을 통해 이성애 중심 문화는 종교의 산물이라고 정의 내린 루이 조르주 탱의 제안으로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로 선포되었다. 쿠바 난민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한 미술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즈는 동성애자가 범죄자와 다를 바 없던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다. 연인을 에이즈로 잃고, 그 역시 에이즈 합병증으로 죽어가면서도 유색인종, 성소수자에게 쏟.. 더보기 전쟁놀이 하늘을 가득 메운 것은 틀림없이 먹구름이다. 좋지 않은 징조를 비유할 때 등장하는 먹구름이 공기를 압박하면서 무겁게 땅으로 내려앉을 기세다. 그래서인지 거리는 어둡기만 하다. 구름 아래 동네에는 아이들이 모여 있다. 얼굴에 표정은 없지만 이들은 볼이 빨갛게 상기될 정도로 집중해서 뛰어노는 중이다. 저 멀리 자전거 타는 아이들이 보이고, 동생을 등에 업고 길에 나온 소녀의 모습도 보인다. 일군의 아이들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무심히 화면을 훑어내리다보면 한 인물과 눈이 마주친다. 관람자를 향해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고 서 있는 이 아이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오싹하다. 그러고 보니, 화면 속 몇몇 아이들이 총을 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누군가는 감시당하며 바닥에 엎드려 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치.. 더보기 가마솥은 사랑이다 가마솥은 어쩌면 동시대 우리의 일상에서는 멀어진 유물이다. 방에서 구들장을 들어내면서 아궁이가 사라졌고, 그 위에 자리 잡았던 가마솥도 부엌을 떠났다. 환경이 바뀌면 도구는 달라진다. 하지만 대가족의 세끼 식사를 감당해야 하는 큼직한 무쇠 가마솥이 부뚜막에 걸려 있던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직 있다. 가마솥에서 구수하게 올라오는 밥 냄새를 맡으면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쉽게 뜨거워지지 않지만 한번 뜨거워지면 쉽게 식지 않는 무쇠 가마솥만이 전해줄 수 있는 음식의 풍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그런 이들에게 가마솥 밥은 그리움이다. 몇몇 식당은 여전히 커다란 가마솥을 사용해서 밥을 짓고, 탕을 끓여 사람들의 추억 여행에 동행한다. 어느 날, 임옥상은 길에.. 더보기 아르메니아 실직 노동자의 손 전시장에 들어서면 아홉 개의 모니터에서 아홉 사람의 손이 움직인다. 양손을 꼭 쥐기도 하고, 비비기도 하고 주먹을 쥐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한다. 프랑스 작가 말릭 오하니안은 손의 동작과 연동해 그들 손이 만드는 박수 소리를 리드미컬하게 편집해 전시장을 채웠다. 경쾌한 박수 소리가 있으니 손동작이 흥겹게 보이는데, 화면에 집중하다보면 거칠고 투박한 손등이며 손가락 마디가 눈에 들어온다, 손의 주인공들은 아르메니아의 실직 노동자들이다. 1991년 독립을 선언한 이후 아르메니아는 시장경제로 전환을 시작하는데, 대량실업, 빈곤, 양극화 현상을 겪으면서도 2004년에 이르면 1990년대 수준으로 경기를 회복한다. 2002년 무렵부터는 한 해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경기가 회복되었지만, 생산 시스템이.. 더보기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들 혁명의 계절이다. 부정선거를 심판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피 흘린 4·19 혁명이 56주년을 맞이했고, 4·13 총선은 민주주의가 후퇴해가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며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 선거혁명이라고 불린다. 5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여러 차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번 선거 결과를 보니 이제 피로써 권력을 심판하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선거 과정에서 내가 흥미로웠던 것은 ‘시민의 눈’이라는 자발적인 시민 감시단의 활동이었다. 부정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두 눈을 부릅 뜬” 이들의 활약은 여러 면에서 자극제가 되었다. 그들이 눈을 뜨고 지켜보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시민의 눈’을 보면서 이우성의 작품 ‘정면을.. 더보기 바리데기 우리는 모두 바다에서 왔다고 했다. 생명 탄생의 첫걸음이 바다에서 시작한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는 무한함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은 무한하다 싶은 것 속에 있다고 느낄 때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고 했다. 그래서 바다를 항해하는 배야말로 인간의 대담함과 지혜로움의 증거라고 했다. 생명의 요람 바다에는 생명이 버려지기도 했다. 아비 목숨을 살릴 생명수를 구해 온 바리데기도 애초에는 부모가 바다에 버렸다. 오매불망 아들을 기다리던 부부 사이에서 일곱 번째로 태어난 딸이었기 때문인데, 부모는 그가 꼭 죽기를 바란 건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 좋은 사람이 구해서 키워주어도 좋겠다 싶었단다. 운좋게 노부부가 구해주어 잘 자란 바리데기는, 제 목숨 살리자고 .. 더보기 오지리에서 작가는 농부의 아들이다.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에서 태어나 성장한 화가 이종구에게 농촌과 고향은 작업의 핵심이다. 그에게 고향의 농부들은 우리나라 농경문화 전통의 마지막 세대일 것만 같다. 그들은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었고, 세계화, 자유무역협정(FTA)의 벽 앞에 무력했다. 시간은 흐르고 권력은 야멸차게 농부의 권리를 앗아가지만 그들은 농촌에서 농부로 산다. 다만 새로운 농부 세대의 등장이 요원할 뿐이다. ‘오지리에서’ 연작은 대선 포스터 앞에 앉은 농부들의 표정을 쌀부대 위에 그린 작품이다. 첫 작품은 1987년 대통령 선거 이후 농부들의 모습이고, 두 번째는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앞에 그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세 번째 그림은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때의 풍경이.. 더보기 그 총알들 어디로 갔을까 보라색은 외향성을 나타내는 빨강과 그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파랑이 혼합된 색이다.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의 이질성이 절묘하게 공존해 조화를 이끌어내는 만큼, 보라색은 혼재하는 감정에 대한 심리를 담는다. 심신이 피로할 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보라색을 찾는다는데 균형을 추구하는 성질이 우리를 치유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균형을 찾는다는 말에는 그것이 결여돼 있다는 고백이 담겨 있으니, 현재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래서 보라색은 우울함, 불행, 죽음, 억압된 감정, 깊은 상처를 뜻한다. 한편 과거에는 안료를 구하기 어려워 특정 신분의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색이었기 때문에 고귀함과 우아함, 권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박영균은 제주 4·3항쟁 때 최후의 인민유격대가 주둔했고, 유격대장 .. 더보기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 인터넷에서 ‘당신은 무엇이 보이나요?’ ‘○○○로 보는 당신의 성격 유형은?’이라는 질문이 붙은 테스트 코너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미지를 들여다보는 나의 시선이 나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심리상태, 성향, 사고 유형을 알려준다고 하니, 점집을 찾는 마음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며 테스트에 몰입할 수밖에. 주재환의 이 그림도 일종의 테스트지 같다. 검은색, 흰색, 노란색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화면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화면을 사선으로 가르는 하얀 부분은 계단이다. 계단 위에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검은 사람을, 어떤 이는 노란 사람을 알아차릴 것이다. 검은 사람에 초점을 두고 보면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이미지가 보인다.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의 연속 동작을 한 화면에 .. 더보기 난센 여권 “아직 얼마 동안은 빛이 우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디자이너 그룹 ‘일상의 실천’이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열렸던 ‘난민’에 대한 프로젝트 에 참여하면서 난민의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문장이다. ‘난센 여권’은 난민을 위한 신분증으로, 탐험가이자 해양학자이면서 난민 구제 활동에 힘쓴 프리드쇼프 난센이 국제연맹에 발의해 1922년 도입되었다. 1942년에는 52개국 정부가 난센 여권을 승인해, 국적 없이 떠돌던 난민들이 난센 여권을 들고 원하는 나라로 이주할 수 있었다. 한국 사회에도 난민이 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은 사회의 약자인 난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예술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난민들은 자신의 삶을 대변할 수 있는 색을 선택하고, 그 색을 매개로 자신의 개.. 더보기 이전 1 ··· 5 6 7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