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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만의 도발하는 건축

‘완성’은 없다

독특한 나선형 관람 구조로 유명한 뉴욕의 명물 구겐하임미술관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최후 작품이자 최고 걸작이다. 생의 말년에 설계를 맡게 된 그는 미술관 인근의 호텔 객실을 장기 계약하고 사무실로 개조하여 완벽한 완성을 향한 의지를 불태운다. 하지만 완공에 가까워지는 어느 무렵부터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공사과정에서 미술관 측과의 마찰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어렵다는 현실에 분노와 실망을 느끼고 본거지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완공된 미술관은 개관 후 30년이 지나 다시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지금과 같은 건축가의 원안에 가까운 방식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라이트는 사망한 후였다. 만약 그가 살아서 그것을 보았다면 과연 작품의 완성으로 보았을까?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나선형 공간. 관람객은 입장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미술관의 맨 꼭대기에서부터 중력을 따라 자연스레 물 흐르듯 내려오며 미술을 관람한다. 초기 개관 후 30년간 이 매력적인 부분은 미술관이 창고로 사용하면서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흔히 우리는 건축가=예술가로 생각한다. 화가는 작품을 완성하고 거기에 서명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창작물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반면 건축가는 그린 도면에 서명을 할지라도 누구도 건축물에 서명하지는 않는다. 이 서명은 완성의 의미가 아닌 책임의 소지를 위함이다. 간혹 머릿돌에 새겨지는 건축가의 이름은 서명이라기보다 완공에 관여한 관계자들의 기록에 불과하다.

 

설계단계에서 건축가의 머릿속에 그려진 명확한 이상은 이후 공사단계에서 무수한 타자들의 개입으로 의도와는 다르게 만들어진다. 다음은 사용단계에서 소유자의 필요에 의해 개조가 발생하고 사용기간이 다하면 리모델링에 의해 대대적으로 변하고 결국 어느 시점에 그것은 소멸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어느 순간을 작품의 완성이라 불러야 할지 의문이다. 피카소 그림의 소유자가 얼굴이 삐뚤게 그려졌다고 똑바로 고쳐 그리면 코미디가 된다. 하지만 완성된 건물의 어느 부분을 소유자가 멋대로 고친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원작자인 건축가가 법에 호소를 해봐도 소용이 없다. 때론 시간이 흘러 건축물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수정이 불가능하게 될 수도 있지만 이는 창작성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그것이 공공재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건축가 팔라디오의 작품집을 구입해 그의 건축에 매료되어 찾아간다. 하지만 실현된 건물은 작품집에 그려진 것과 다름을 목도하고 놀란다. 팔라디오 같은 대건축가도 현실에서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따지고 보면 그런 것이다. “명확한 의도는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의도대로 성립되지는 않는 법이다.” 간혹 예외가 있긴 해도 세월이 흘러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원래의 명료함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는 생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고 전해지는 것은 사유뿐이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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