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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너무 걱정 마

정강자, 너무 걱정 마, 2015, 캔버스에 오일, 90.9x 72.7cm


얼마 전 암투병 끝에 75세로 별세한 정강자 작가의 생전 인터뷰에서 “작품을 하는 동안 필요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살아왔다”는 문구를 보았다. 유년기 이후 50년 넘는 세월을 예술가로 살아가면서 늘 ‘죽음’을 각오했다는 고인은 발병 이후에도 하루 12시간 작업에 매진했다고 했다.

 

한국 미술계에서 정강자의 등장은 센세이셔널했다. 1968년, 당시 청년문화의 중심지였던 무교동 세시봉에서 열린 퍼포먼스 ‘투명풍선과 누드’ 무대에 작가는 블루머와 흰 머플러만 걸친 채 등장했다. 사람들은 투명풍선을 불어 작가의 몸에 붙였고, 작가가 일어서면 관객이 달려들어 풍선을 터뜨렸다.

 

한국 최초 페미니스트 문맥의 퍼포먼스로 평가받는 이 작업은, 가부장적 사고에 둘러싸인 경직된 사회에 문화적 해방구를 여는 신호탄 같은 시도였다. 구태의연한 방법론을 강요받던 시절, 새로움을 꿈꾸었던 작가는 기존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것에서 창작의 가치를 발견했다. 20대 시절 그는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을 통해 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갔다.

 

그가 말년에 집중했던 것은 ‘반원’이다. 직선과 곡선이 공존하는 그 형태에서 작가는 한복의 선, 한옥 처마의 선, 우리 강산의 선처럼 ‘한국적인 선’의 정서를 발견했다고 했다. 직선과 곡선의 앙상블이 끌어내는 에너지를 화폭에 담으며 세상의 질서를 들여다보았다.

 

반원과 인체를 연결하는 조형적 시도가 눈에 띄는 ‘너무 걱정 마’는 일종의 자화상 같은 작업이다. 암 덩어리를 안고 있지만 담담함을 잃지 않았던 작가의 선명한 눈빛과 온화한 손짓이 화면에 고요한 동세를 만든다. 죽음을 또 다른 창작의 계기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작업에 집중한 작가는 너무 걱정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구름처럼 세상에 스며들었다. 고인의 일평생에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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