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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높임의 화술

박관택, 루핑 Loop, 2019, 종이에 아크릴채색, 칼로 자르기, 455×273㎝(사진촬영 조영하)


“네에, 그럼 그렇게 하시죠.” 도널드 트럼프처럼 직설적인 ‘말버릇’과 거침없는 태도로 살기에는 손에 쥔 것이 너무 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겸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라는 갑옷이다. 힘 있는 자가 겸손한 언행마저 갖춘다면, 그의 화술은 상급 레벨의 처세술로 칭송받을 것이니, 보통사람이라면 이 당연한 태도 위에 세련미와 재치까지 겸비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생존용 교양화술을 갖추었다 할 것이다.


박관택이 종이에 써내려간 화술은, 청유하거나, 이중부정하거나, 모호하게 흐리거나, 계속 호응하거나, 동의하고 동일시하는 식이다. 상대를 은근히 높여주는 이런 화술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문제는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이 실전에서 사용하면 좋을 법하다. 그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단한 성공을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멘털만 온전하게 유지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상실감, 분노를 일깨우는 망언과 폭언은 다른 의미에서 대중을 설득하는 화술이다. 그러나 이 역시 가진 자의 무기일 뿐. 보통의 내가 상대의 신뢰를 얻고 청탁에도 성공하고 싶다면, 내 위치에 맞는 화술을 갖추어야 한다. 폐쇄형 질문으로 상대의 확답을 유도하고, 감탄하고 반문하고 비유하고 동조하면서 상대방의 동의도 유도해야 한다. 세상에 떠도는 온갖 거절법, 설득법, 청탁법 같은 대화 매뉴얼은 다 쓸데가 있다. 


“그렇군요. 역시 그랬구나.” 상대를 부드럽게 긍정하면서 대화를 시작할 때 그는 ‘이득’을 볼 수 있다. 긍정의 화술은 사람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킨단다. ‘하지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등으로 시작하는 말은 오해나 문제의 소지를 불러올 수 있는 손해 보는 말하기라고 하니, 보통의 사람들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누구나, 때로는 단호하고 싶다. 그래봐야 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문장은 이 정도가 최선이겠지만.


“그렇긴 한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요?”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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