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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달리는 혀

시오반 데이비스 & 데이비드 힌톤, 달리는 혀, 2015, 디지털비디오, 28분 ⓒ시오반 데이비스 & 데이비드 힌톤


살아 있는 자의 혀는 언제까지 질주할 것인가. 그의 혀는 세상에 나온 이래, 인간계의 몸짓을 배우고, 모국어를 배우며 세상과 교류해 왔다. 더 빠른 혀, 더 능숙한 혀를 만나며 더 성장했다. 그러나 이 혀는,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달려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누구의 의지로 달려나가는지 알아차렸는가.


안무가 시오반 데이비스와 영화감독 데이비드 힌톤은 ‘달리는 혀’라는 이름으로 22명의 무용가와, 사운드 아티스트, 애니메이터를 초대했다. 무용가들은 끊임없이 달리기만 하는 여인 ‘헬카 카스키’의 이미지를 받았다. 이제 그들은 프레임 안에 헬카의 인생을 써내려가야 한다. 각자 10초의 시간을 책임졌다. 무용가들은 프레임 안에 다양한 이미지를 콜라주해 넣었고 데이비스와 힌톤은 그들이 제시한 헬카의 인생샷들을 편집했다. 각 무용가가 콜라주한 10초는 헬카 인생의 짧은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인생 전체일 수도 있었다.


헬카는 22명의 무용가들이 각자 만들어 준 인생의 장면들을 달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지하철역, 주택가, 카페, 공원 등 런던의 익숙한 풍경 사이를 달리다 보니, 그의 혀는 성장을 거듭한다. 이웃 사람들의 일상을 스쳐 달려나가는 그는 하늘에서 갑자기 석탄비가 쏟아지거나, 먼지가 뿌옇게 차오른 장면 안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별빛 찬란한 들판 위를 달리기도 한다. 모두 그의 의지는 아니다.


헬카가 달리는 프레임 안의 세상은 22명의 무용가들이 각자 자기 선택을 담아 콜라주한 세상이지만, 그 안에서 쉼없이 달리는 헬카는 덕분에 지나간 삶을 배우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겪는다. 고요함이 움직임보다 강한 순간을 만난다. 아주 작은 행동이 큰 무게와 변화의 핵심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번 선택이 다음 선택을 이끌어내며, 우리의 ‘비전’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헬카는 체험하고 있다. 비록 ‘일루전’의 세상 안에서 달리고 있을지라도.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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