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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무너진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크리스 로, 무너진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2019, 1000×667㎜, 오프셋 리소그래피, 팬톤 실버 877U_, 큐리어스 매터 데지레 레드, 270g/m2


무너져내린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사랑에 실패해서, 경쟁에 밀려나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져서 무너진다. 믿었던 사람들과 세상이 무심하게 등을 돌리고 비난해서 무너지고,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신념을 배반당해서 부서진다. 그 자신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망가진 상황에 내려앉기도 한다. 오류와 모순을 헤치고 나서려 해봐야 출구를 찾을 수 없고, 지금보다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는 친구들은, 차라리 지금 여기 있는 내 존재의 명분을 설득하기 위해서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들이 하늘이 무너지고 마음도 몸도 부서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나면, 서로의 어깨가 쓸모 있는 버팀목이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도 무너진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삶의 바닥에 도달한 친구들이 보내는 신호와 징후를 알아차리고 위로할 수 있을까. 우리의 우정이 친구들의 마음을 끌어올려줄 수 있을까. 


크리스 로는 강력하고도 의미심장한 ‘편지’의 힘에 기대보기로 한다. 1년 동안 마치 일기를 쓰듯 자기 자신에게 팩스를 보내고, 그 팩스 이미지를 바탕으로 작업한 작가는, 팩시밀리에서 통신수단 이상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전화기보다 더 먼저 세상에 등장한 이 기계 장치가 디지털화하기 번거로운 이미지와 텍스트를 전달할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시공간으로 감정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팩시밀리를 통해 친구와 감정을 교감하는 상황을 시각적인 시퀀스로 담았다. 기계를 통과한 손편지는 전기신호로 전환되어 친구의 팩시밀리에 도착한다. 우리의 감정도 팩시밀리 안에서 접히고 펼쳐지며 친구의 손에 닿는다. 이제 우리는, 친구가 편지에 담아 보내올 마음을 기다리며 팩시밀리를 지켜볼 것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놓여 있는 우리들에게 아직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팩시밀리 앞을 지키고 싶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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