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 마스크, 1960년대, 18×18×11㎝, 테라코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의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잘 썩지 않습니다. 세계 최고의 테라코타는 1만년 전 것이 있지요.”
권진규(1922~1973)는 “불장난에서 오는 우연성을 기대할 수 있고, 결정적인 순간에 딴 사람에게 마무리 손질을 맞길 일이 없는” 테라코타를 사랑했다.
미술품 복원가 김겸이 확대경을 끼고 권진규의 테라코타 내부를 들여다보았던 경험을 남긴 칼럼을 보니, 예민하고 섬세한 예술가의 초상이 보인다. 대개의 점토작업이 수제비를 뜨는 정도의 밀가루 덩어리 크기로 점토를 떼어내 매만지는 데 반해 권진규는 작은 콩알만 한 크기의 점토를 붙여가며 형상을 빚고 있었단다. 이 전문가는 작가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살아 움직일 듯한 생명의 긴장감이 “고집스럽게 심어 넣은 작은 생명체의 떨림”에서 오는 것인 아닌가 경탄한다.
만물에는 구조가 있건만, 한국조각에는 그 구조에 대한 근본 탐구가 결여되어 있다며, 지금의 조각은 외국 작품의 모방에 그치고 있다는 점을 개탄하던 이 조각가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전국의 사찰을 돌며 한국조각에 결여되어 있는 그 구조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서구의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조형이념은 그들의 골수에 뿌리박은 사상, 생활감정을 집약하여, 그 전통을 바탕으로 나온 것임을 상기하며, 그들이 지향하는 예술 흐름 속에 우리 창작의 초점을 맞춘다면 영원히 그들의 뒤만 좇는 자기상실자가 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작가가 하회탈, 병산탈과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의 부조작품을 탐구하며 찾아낸 형태를 녹여낸 테라코타 마스크와 눈을 맞춰 본다. 사람의 눈을 피해 변장하고, 가장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세상을 향해 거침없는 발언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마스크를 만들며 작가는 숨어들거나, 뛰쳐나가기를 반복했겠지.
그의 유작을 두고 유족과 미술관 사이 갈등이 불거지고, 송사가 이어지는 상황을 보며, 새삼스럽게,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가 꿈꾸었을 비전에 접속해본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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