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미, 이승/저승, 2019, 서울시립미술관 안은미래 전시장면 ⓒ복코
관계는 상대적이다. 너는 그가 세상에 다시없을 좋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계기가 있다면, 어제의 우리와 오늘의 우리가 만드는 관계는 달라질 수 있겠다. 다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 옷이 너에게 찰싹 달라붙는 걸 보며, 내가 멀리하는 음식이 너에게는 보약이 되는 걸 보며, 나에게 추억을 소환해주던 물건이 네 손에 들어가서는 주저 없이 쓰레기가 되는 걸 보며 세상은 온통 상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전시장에 빼곡한 비치볼은 내 발목 근처에서 오종종 굴러다녔다. 네댓 살쯤으로 보이는 꼬마가 들어 올리자, 가슴팍으로 한아름 안겨든다. 비치볼이 더 이상, 내 무릎 아래에서 보았던 것처럼 작지 않다. 오히려 제법 크다. 비치볼은 아이의 품 안에서 상대적으로 아름다운 비례미를 과시했다. 기준은 내가 아니었다. 안은미래의 전시장 한가운데 넓게 펼쳐진 하얀 플로어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받아줄 기세였다. 훈련된 전문가의 몸은 이곳을 무대로 만들었다. 조명을 입은 몸짓이 흥겹다. 다른 날 그 몸이 프로덕션 리허설을 진행하자, 이제 무대는 연습실이 된다. 플로어는 훈련되지 않은 몸도 흔쾌히 허락했다. 그들은 플로어 위에서 ‘춤을 공유하고 배우고 놀아’보는 중이다. 음악이 그들 움직임의 빈 곳을 스르르 채워준다. 물리학자가, 평론가가, 건축가가, 미술가가 올라서니, 청중은 앉아서 그의 말을 경청한다. 플로어는 무리 없이 강연장이 되었다.
고요하게 텅 비는 어느 날이면, 누구라도 플로어 위에 올라가, 무엇이라도 하거나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다. 조명이 돌고 음악이 흐르고 몸이 진동하는 플로어는 ‘전시장’이 늘 ‘전시장’이어야 할 이유가 그다지 절대적이지 않았음을, ‘과정’이 ‘결과’가 아닐 이유가 없었음을 고백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