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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미어캣의 스카프

임경섭, 미어캣의 스카프, 2013


어느 날, 외국 여행에서 돌아온 미어캣의 목에는 붉은 천조각이 펄럭이고 있었다. 마을의 미어캣들은 시선을 빼앗겼다. “이건 스카프라고 해. 아주 먼 곳에서는 가장 똑똑하고 사냥을 잘하는 미어캣들만이 이런 스카프를 두르고 있지.” 그는 자신에게 먹이를 많이 가져오는 미어캣들에게만 이 스카프를 주겠노라 선언했다.


사실 마을의 모든 미어캣이 처음부터 이 붉은 천조각에 매료된 것은 아니다. 스카프 없이도 그들 공동체는 행복했다. 아침에 일어나 적당히 사냥한 식량으로 배를 채우고, 볕을 쬐며 낮잠에 빠져드는 고요한 일상이 당연했다.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살던 미어캣들의 삶은 스카프를 두른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스카프가 용맹함, 특별함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면서부터 다른 속도와 욕망으로 빨려들어갔다. 스카프가 없는 이들은 불안했다. 초조함에 등떠밀린 이들은 새벽부터 먹이사냥에 나섰다. 먹이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럴수록 미어캣들은 바빠졌다.


이제 모두가 붉은 스카프를 두르는 순간이 왔다. 더 이상의 불안은 없을 것 같은 그 순간 ‘용맹함’이라는 상징성은 새롭게 등장한 가을 하늘빛 스카프에로 넘어간다. 붉은빛 스카프를 향해 질주하던 미어캣들은 이제 하늘빛 스카프를 욕망한다. 그 욕망은 또 달빛 스카프로 넘어간다.


필요하지 않아도 그들은 ‘유행’의 장단에 맞춰 달렸다. 그 흐름에서 도저히 발을 뺄 수 없었다. 휘몰아치는 무한 경쟁의 채찍질 안에서 개인은 불안해졌고 공동체는 깨어졌다. 불안한 마음이 물질적인 신분상징에 대한 갈망을 자극했다. 찬양받고 존경받고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멋있게 포장해줄’ 물건을 소유하는 미어캣이 되었다. 그 안에서 그들이 배운 것은 ‘열등감’이었다. 


마을의 식량은 이제 바닥을 보인다.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이 터전에 남은 건 쓸모없는 색색의 스카프뿐이었다. 대부분의 미어캣이 떠나버린 터전에 여전히 남은 미어캣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작가 임경섭의 질문은 여기에서 다시 시작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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