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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화가의 초상

필립 거스턴, 스튜디오, 1969, 캔버스에 오일, 180.3×186.1㎝



“필립 거스턴은 너무 감동적이에요. 그의 작품을 보면서 계속 작업할 수 있는 에너지를 받았어요.” 


좋은 그림을 만났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미술계 지인들이 필립 거스턴(1913~1980)에 대한 무한 애정을 고백했다. 화가로서 그가 보여준 집념, 선택을 보면서 예술가는 누구인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유대인 정체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름 ‘골드스타인’ 대신 ‘거스턴’을 사용하면서, 잭슨 폴록 등과 함께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표화가로 활동하던 그는, 화면의 순수함과 평평함을 추앙하던 당시 주류 미술 담론 안에 온전히 있었다. “순수함에는 이제 염증이 난다. 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당시 화단의 분위기상 추상화라는 대세에서 비켜나와 화면 안으로 형상을 돌려놓은 것은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순결함을 요구하던 세상에서 벗어나, 신비화를 지워버리고 만화 같은 형상 안에 유머, 폭력, 그로테스크한 우화를 담아갔다. 그의 그림은 스캔들을 낳았다. 촉망받던 예술가는 추상미술의 배신자가 되었고, 불쾌감의 대상이 되었다.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못 그리는 척한다는 비아냥 섞인 평도 들어야 했다. 


그의 예술세계가 극단적으로 변한 것을 두고 세상은 그 이유를 짐작해본다. 어린 시절 경험한 아버지의 자살, 형의 사망 같은 개인적 비극이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모든 것을 바꿔놓은 한 해’로 평가받는 1968년 전후, 정치·사회·문화적으로 격변하는 세상 안에서, 특정한 대상을 향하지 않고 메시지를 삭제하는 ‘순결한’ 캔버스를 부여잡고 살아가는 일 자체로부터 느꼈을 화가의 무기력함도 이야기한다. 


의심과 두려움, 갈등을 창작의 동력으로 삼았던 화가는 그림 안에서 끊임없이 예술가 자신을 분석하고 이야기를 건넸다. 세상의 눈과 세간의 평가는 내 몫이 아니니, 그런 것은 뒤로한 채 그저 그렸다. 


그의 선택이 세상과 제대로 만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고, 많은 예술이 그렇듯이 그의 시도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한발짝 늦게 왔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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