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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어두울 때 보이는 것


도윤희, 무제, 2014, 캔버스에 유채, 200×150㎝


어둠이 필요하다. 찬란한 빛이 쏟아내는 정보를 처리하며 세상과의 만남을 앞장서 주선해 온 두 눈의 수고로운 세월은 잠시 뒤로하자. 너무 밝은 빛은 오히려 눈을 가리는 법. 지금은 차라리 이 부지런하고 영민한 시각이 그간 축적해 온 경험을 내세워 판단하고 타협하고 수용할 여지를 줄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필요하다. 빛에 취한 망막에 기대고 싶은 그 어떤 가능성마저 온전히 차단당한 어둠 앞에 섰을 때, 동공은 더 크게 열릴 것이다.


“어둠은 빛의 부재이나, 빛 없이 어둠을 말할 수 없다.” 빛에 제대로 닿고 싶다면 어둠을 파헤칠 일이다. 도달하고 싶은 세상이 있다면, 차라리 그 반대를 살핀다.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일은 종종 당혹스럽지만, 극과 극은 동전의 앞뒤처럼 닿아 있다. 극에서 극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면 집요해질 필요가 있다. 적당히 가다가는 그 사이에 갇히고 만다. 빛이 은폐한 ‘광명’에 닿지 못한다.


태양빛 아래에서 화가 도윤희는 반짝이는 대기 속에 부유하는 빛의 검은 잔상을 보았다. 대낮의 광선은 그를 표피 너머의 세계로 인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세계를 외면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무력감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의지’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선택지에 들어 있지 않다. 화가는 연필과 붓을 내려놓은 채 맨손을 캔버스 위에 올렸다. 예술가 자신이 예술작품이 되고 마는 ‘춤추는 몸’처럼 캔버스와 몸 사이의 거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글을 쓰듯’, 손의 감각으로 색을 펼치며 빛의 장막을 파헤쳤다. 어둠은 경계를 지우고 자유를 주는 대신 두려움을 선사했다. 화가는 불안을 안은 채, 어둠이 독려한 감각에 기대 한 겹, 두 겹 빛의 장막을 들춘다. 반짝임이 튕겨내는 표피들을 걷어내는 데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끝에 화가가 도달한 세계는, 그림 안에 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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