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은, 묵정(墨井), #05
묵정동은 먹색으로 보일 만큼 깊은 우물이 있던 동네의 이름이다. 지금 이곳에는 우물 대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여성병원이 자리해 있다. 그리고 이 병원에는 누군가의 엄마로 혹은 딸로 살아오던 여자들이 아파서 찾아온다. 큰 병원을 찾을 정도면 작은 병은 아닐 터이고, 그런 병을 앓고 있는 여자들의 속은 이미 깊고도 검다.
한경은의 ‘묵정’은 난소암을 앓고 있는 엄마가 이 병원에 입원하면서 시작했다. 엄마 곁에서 간호하고 응원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은이 엄마’가 아니라 ‘명호씨’라는 여자의 인생이 되뇌어졌다. 그렇게 해서 기록을 시작한 명호씨의 투병기는 같은 병동에 입원한 엄마 또래의 ‘이모’들에게까지 번져갔다.
작가는 자궁암이나 유방암 등 여성만의 질환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환자들을 복도를 배경 삼아 모두 동일한 형식으로 촬영했다. 죄다 똑같은 환자복을 입은 이들은 얼핏 보면, ‘명호씨’가 그랬듯 가족 속에 묻혀 살아온 익명의 아줌마일 뿐이다. 그러나 빠진 머리카락을 감추기 위해 두른 모자며, 목에 두른 스카프, 하다못해 양말 생김새까지도 그녀들이 내뿜은 강한 개성을 비켜갈 수는 없다. 사진 속 환자들은 저마다 팔에 링거 줄을 매달고 있다. 보일 듯 말 듯 프레임 안과 밖을 연결해 주고 있는 그 줄은, 마치 거추장스러운 인생의 무게이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생의 희망처럼 중의적이다. 너무 깊어서 맑아도 검게 보이는 우물처럼.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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