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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먼지가 생명을 위협하는 날. 건물이 허물어지는 날. 다리가 무너지는 날. 배가 가라앉는 날. 그런 날들이 올 것을 누가 알았을까. 전조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균열은 사소하게 출발하고, 균열은 마치 처음인 양 반복되었다. 부조리를 인내하는 날들의 끝에 있는 것은 절망이었다.

 

송주원,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2017, 댄스필름

 

2016년 겨울을 광화문에서 보내며 송주원은 인간의 안일한 태도가 이 사회에 큰 사건과 상처를, 위험과 공포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아무것도 반성하지 않는 가운데,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는 시인 김수영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작가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나의 삶에서 ‘반성이라는 것’을 언제 했던가. 제대로 한 적은 있던가.

 

절망의 날들을 보내던 그해 겨울, 작가는 이 질문을 안고 작업을 시작했다. 김수영의 시 ‘절망’의 시구를 모티브로 한 여성의 하루를 풀어놓은 댄스 필름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은 위태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조망하여 일상의 반성과 절망에 대한 질문을 몸으로 표현해보는 작업이었다.

 

한없이 ‘일상적’인 하루 일과 속에, 귀신과 함께하는 판타지적인 순간들이 섞여 들어가는 가운데, 작가는 주인공이 퇴근 후 식탁에 앉아 마시는 와인병에 ‘킬러’를 써넣고, 곳곳에 노란 리본을 매달았다. TV에서는 이제 탄핵된 대통령이 좋아하는 연예인 이야기에 미소 지으며 인터뷰하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주인공은 손으로 삶은 계란을 부수며 ‘분노’를 표출했고, 주인공과 ‘동거’ 중인 귀신들은 정신없이 달력을 찢어 넘기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때만 해도, 세상이 바뀔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작가는 절망의 끝에서 ‘구원’의 순간을 만난 이들 앞에, 끝까지 반성하지 않을 이들 앞에,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현실의 절망과 희망의 역설을 내놓았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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