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기술 덕분에 아주 빠른 속도로 정보, 지리, 경제, 문화, 정치의 벽이 무너지고 있으므로, 세계는 평평할 뿐 아니라 더욱 평평해질 거라고 한 토머스 프리드먼의 말은 여전히 유효할까.
그는 평평한 세계에서 경쟁자들은 공평한 기회를 획득하고, 가치는 수평적으로 창출될 것이라고 했다. 경제 분야의 경쟁은 평등해질수록 치열해질 테니까, 개인의 경쟁력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어떤 학자들은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는 세상의 면면을 언급하면서 세계는 둥글고, 뾰족하고, 울퉁불퉁하다고 했다.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상대성, 1953, 판화, 282×294㎜
130여년 전, 에드윈 애벗은 2차원의 납작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플랫’한 세상 속에 사는 이들은 직선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신분이 높을수록 오각형, 육각형 등 더 많은 각을 갖고 있었고, 신분에 따른 꼼꼼한 차별이 플랫랜드 전역에 평평하게 펼쳐져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산업혁명 이후 경제적 위치는 상승해도 여전히 작동하는 경직된 계급사회의 프레임 안에서 갑갑증을 느끼던 이들은 다른 차원으로부터의 희망을 꿈꾸었다. 하지만 자신이 갇혀 있는 ‘차원’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60여년 전, 에셔는 3개의 공간 차원과 1개의 시간 차원을 가진 시공간 구조를 상상하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납작한 화면에 그려 보았다. 여러 개의 중력장이 공존하는 평면 안에서, 누군가에게는 수직이 누군가에게는 수평이 되는 장면을 프레임 밖의 이들은 조망한다. 평면 속에서 각자의 중력에 기대 살아가는 이들은 서로를 알아차릴 수 없을지 모른다.
에셔의 ‘상대성’에서,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세상, 다름이 공존해야 하는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읽어내는 이들의 목소리는, 납작한 스크린들과 함께하느라 우리의 세상이 사실은 요철투성이임을 깜박 잊곤 하는 나에게 뾰족한 가르침을 준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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