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 1915, 캔버스에 유채, 79.5×79.5㎝,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작품 ‘검은 사각형’에는 두 개의 그림층이 숨어 있다. 가장 아래에는 입체 미래주의 화풍의 그림이, 그 위로는 회화의 의미를 고민하던 그가 새로운 형식을 실험한 흔적이 있다. 물질이 지배하는 현실세계를 재현하는 역할로부터 회화를 독립시키고 싶었던 그는 고민이 축적된 캔버스를 검은색으로 덮은 작품 ‘검은 사각형’을 발표하면서 재현을 벗어난 순수표현을 주창하는 ‘절대주의’를 탄생시켰다.
철저한 무에서 시작할 때 비로소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 말레비치의 도전은 예술의 낡은 병폐를 묵인하고 추종하는 태도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이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검은 사각형’의 의미를 확장시키며 자신의 예술관을 설파했다.
‘검은 사각형’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15년, 연구자들은 검은 사각형 주변 흰 테두리에서 “어두운 동굴 속 흑인들의 전투”라는 글귀를 찾아냈다. 말레비치가 남긴 이 글로부터 학자들은 프랑스 작가 알퐁스 알레가 1882년 발표한 작품을 떠올렸다. 전복적인 상상력으로 시대의 엄숙주의를 풍자하던 예술가 알레는 검은 직사각형 아래로 “어두운 동굴에서 흑인들의 전투”라고 써놓은 작품을 발표했다. ‘너무 어두워서 분간할 수 없는 상태’라는 의미로도 해석한다는 이 문구를 말레비치가 작품 한쪽에 적어놓은 것으로 보아, 그가 알레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온다.
지난 화요일, 인스타그램의 타임라인에 두 예술가의 작품을 닮은 검은 사각형이 차올랐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갈등이 표면화되고, 사람들은 검은 사각형으로 지지의 마음을 전했다. 검은 사각형은 또 하나 무거운 의미를 짊어졌으니, 이제 어둠을 걷어내고 분별을 세울 시간이 왔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kimjiy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