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로니무스 보슈, <바보치료-어리석은 돌을 제거하다>(1475~1480) 캔버스에 유채, 48×35㎝, 프라도 미술관
초현실주의자들이 흠모한 두 사람이 있다. 프로이트와 보슈다. 당시 지식인과 예술가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프로이트는 동시대 사람이었지만, 히에로니무스 보슈는 500년 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북구 르네상스의 거장이었다. 인간의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악몽처럼 그린 보슈는 여행을 전혀 하지 않았고, 집 밖에 나오는 일도 없었다. 거의 은둔자였던 보슈는 마치 악마와 교통하듯이 지옥의 세계를 잘 알고 있었다. 대표작인 ‘쾌락의 정원’과 ‘최후의 심판’은 그가 가진 상상의 세계가 얼마나 엽기적이고 불가사의하고 세기말적인지 보여준다.
중세 말은 잦은 천재지변과 전염병, 전쟁, 반란 등 세기말적인 징후가 가득한 시기였다. 이 시기를 통과한 보슈는 세상은 진정한 안식처가 아니라 험난한 순례를 거쳐야만 하는 죄악이 가득한 곳이라고 여겼다. 당시 수도원이 증가하고 성직자 수가 많아짐에 따라 그들의 타락 또한 극심해졌다. 보슈는 타락한 수도생활을 풍자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풍요로운 여름, 수도사로 보이는 외과의사가 의자에 묶인 남자의 머리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다. 우둔, 광기, 허영의 뿌리인 돌을 제거하는 수술이란다. 바깥 글씨는 “선생, 돌을 빼주시오! 나는 루베르트 다스라고 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루베르트는 네덜란드 문학에서 어리석은 사람을 지칭한다. 당시 네덜란드 소설에서는 머리에서 어리석음의 돌을 제거하는 엉터리 치료법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수도사와 수녀는 이 외과 수술을 방관, 묵인하고 있는데, 이는 타락을 암시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머리에서 꺼낸 것! 그것은 돌이 아니라 꽃, 튤립이다. 탁자 위에도 튤립이 놓여 있다. 16세기, 튤립은 네덜란드어로 어리석고 아둔하다는 의미였다. 이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인간의 허영과 어리석음을 표현했던 우의화의 주된 소재가 튤립이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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