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리트, 연인, 1928년
어쩌면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말한 것에 의해서보다는 침묵한 것에 의해서 그를 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 마그리트는 좀체 유년 시절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는 추억들도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매우 환상적인 것들로 채워나갔다. 이처럼 의식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그의 기억들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베일을 씌운 그림들이 그렇다.
마그리트의 ‘베일’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렇다. 유년 시절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미지로부터 왔다는 것. 우울증이었던 어머니가 야밤에 몸을 강에 던져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13살의 마그리트가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잠옷으로 가려진 얼굴과 신발을 거꾸로 신은 몸이었다. 어머니가 스스로 택한 죽음을 보지 않으려고 옷으로 얼굴을 덮었는지, 아니면 소용돌이치는 파도 때문에 속옷이 얼굴에 뒤덮였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이 트라우마적 사건은 마그리트 작품에 얼굴을 흰 천으로 뒤집어쓴 인물(‘연인들’ 연작)들로 드러난다. 어머니에 대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마지막 기억을 시각화한 것인 동시에, 당시 어머니의 죽음으로 한번도 주목받지 못한 어린 소년이 ‘죽은 여인의 아들’로 갖게 되었던 사건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그림 속 연인들은 아주 강력하게 빨아들일 듯 키스를 한다. 그렇지만 진짜 살이 맞닿는 뜨겁고 깊은 키스(사랑)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늘 아쉽고 아련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 사실 사랑할 때, 그 대상의 실체를 사랑하기는 어렵다. 결국 인간은 어떤 대상에 베일을 씌워 자신의 환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베일을 벗겨냄을 지속적으로 연기하는 것, ‘무’(nothing)인 걸 알기에 그것을 보기를 대체로 미루어버리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닌 거다. 그러나 사랑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어떻게 환상을 지나, 환멸을 통과해 진정으로 사랑할 것인가. 그것이 가능할까.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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