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보 선생이 찍은 제주시 화북동 자신의 외갓집 돌담. 2019. ⓒ강광보
노인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표정 너머 잔잔한 실웃음이 퍼져 있었다. 그가 사유하듯 가만히 바라보는 곳은 더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었다. 끊임없이 철퍼덕거리는 파도의 울림을 등 뒤에 두었지만 그는 아무런 요동 없이 고요했다. 잠시 뒤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낸 노인은 시선이 고인 그 집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단 한 장의 사진이 그렇게 세상에 남겨졌다.
그에게 어떤 감흥이 있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가 어릴 적 우리 외갓집이라오. 건너편 우리집에서 거의 벌거숭이처럼 뛰어와 바다에서 멱을 감고 놀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허허허.” 한결 얼굴이 활짝 핀 노인은 “저 돌담 위에 올라앉아 바다 구경도 하고 해 떨어지는 노을풍경 보던 때가 바로 며칠 전 같아요”라고 말하면서 70여년 전 자신의 모습처럼 해맑은 웃음을 내어 보였다.
제주시 화북동 작은 어촌이 고향인 ‘강광보’ 선생은 그렇게 한 장의 사진으로 자신의 추억을 되살려냈다. 그의 생애는 기구한 고통 속 삶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일본에 밀항했다가 1979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아무런 죄없이 체포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가 결국 ‘간첩’으로 낙인찍힌 채 7년 동안 교도소에 갇혀 있어야 했다. 조작된 간첩사건의 희생양이 된 그는 재심 끝에 2017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잃어버린 세월을 품고 살아야 할 그는 가슴에 드리워진 상처를 달래면서 다시 평화로운 삶의 꿈을 펼쳐가고 있다. 어릴 적 추억의 공간들을 찾아 자기 생의 의미를 돌아보는 당신의 걸음을 보며 이 아름다운 ‘자기와의 동행’에 큰 박수를 드리고 싶다.
<임종진 사진치유자·공감아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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