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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오늘하루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걸음

과거 부산보안대를 둘러싼 담벼락이 있던 자리에 서서 자신이 몸을 숨겼던 주택가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 2017. 부산. ⓒ최양준


이 자리에 다시 서기까지 35년이나 걸렸다. 무려 일만삼천 날이 넘는 긴 세월을 떠나보낸 뒤에야 이 작은 둔덕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 근처에는 절대 얼씬거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그 긴 시간을 견뎌냈다는 올해 나이 여든의 최양준씨. 두려워서 올 수 없었다고 말하는 이 자리를 찾아 한 장의 사진까지 찍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82년 간첩 혐의로 부산보안대에 끌려간 그는 무자비한 고문수사를 견디다 못해 틈을 타 탈출을 시도했다. 철망과 창살로 둘러쳐진 3m 높이의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영화에서나 나올 일을 오로지 살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그가 가능케 했다. 


온몸이 찢겨나간 채 피가 철철 흐르는 몸으로 그가 섰던 자리. 막 내려선 담벼락 앞에 서서 이제 살 수 있지 않을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자리. 잘못된 국가권력에 탈출이라는 저항으로 맞섰던 자리가 바로 이곳이었다. 자신의 그림자 끝이 향한 주택가에 숨어 있다가 다시 체포되었지만 희한하게 그때부터 고문을 안 하더라고 그는 다시 회상했다. 고문사관들이 놀라서 꼬리를 내린 거라고, 대단한 일을 해내신 거라고 말해주었더니 배시시 그가 웃었다. 그 자리에 서보니 맘이 후련해지더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사실이 그러했다.


2011년 오랜 재심 끝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그는 몇 해 전부터 사진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간첩이 되어 모진 고문과 10여년의 교도소 생활을 감내해야 했지만 아픈 기억에만 빠져 자신을 묶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걸음, 간첩조작사건 고문피해자 최양준 선생이 말하는 카메라를 든 이유는 그랬다.


<임종진 사진치유자·공감아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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