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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 아주 옅은 살색 벽면에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가 미묘한 차이로 빛난다. 그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네모난 구멍이 있고, 그 아래에는 왜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는 판이 벽면의 겉과 속을 가로지른다. 색감과 재질로 보아 벽면과 같은 자재로 보인다. 벽면의 겉이 되는 판이 벽면의 속을 침투한 모양새라 흥미롭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구멍을 통해 벽 속에 다양한 자재가 숨겨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얇디얇은 판 하나를 경계로 눈에 보이는 ‘겉’과 보이지 않는 ‘속’이 나뉜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정지현의 사진 연작 ‘CONSTRUCT’는 건물이 완성된 이후에는 마감재의 표면에 가려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감춰지는 건축 자재와 공법 등을 가시화한다. 그동안 건물의 해체 과정에서 신축 현장까지 건축의 생애주기와.. 더보기
구름 고래 넓은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처럼, 높은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처럼 끝없이 끝없이 여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힘들면 쉬어가고, 마음에 들면 그곳에서 살아보고, 익숙해지면 또 낯선 곳을 찾아 떠나보고. 그렇게 그렇게 고래처럼, 구름처럼 시간은 잊어버리고 온 세상을 쉬엄쉬엄 둘러보고 싶습니다. 더보기
대피소 리허설 박준범이 민통선 마을 대피소에서 마주한 장면은 상상과 달랐던 모양이다. 어떤 마을 대피소 안에는 감자만 가득하다던데, 그가 방문한 곳은 다양한 운동기구를 갖추고 있었다. 비상시에는 몸을 보호할 수 있도록 돕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테지만, 평상시라면 주민들의 건강 증진을 돕는 역할도 기꺼이 수용하는 다목적 공간인 셈이다. 북한으로부터 언제 날아들지 모를 포탄의 사정거리 안에서 사는 이들에게 위협을 가정하고 대피를 준비할 때 피어나는 ‘공포’의 무게는, 헬스장으로 변신 가능한 대피소의 무게감과 비슷해졌을지도 모른다. 불안감은 지독한 일상이 되어 불안해도 불안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북한과의 경계지역에 있는 마을에 북으로부터 위협이 닥치는 긴박한 재난 상황을 가정했다. 재난 시 제일 먼.. 더보기
불볕더위 너무 뜨거운 날씨입니다. 모든 것들이 펄펄 끓어오르고, 녹아내립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고, 햇볕을 쪼이자마자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 땀이 흘러내립니다. 뱀파이어가 된 듯 햇볕을 피해 그늘로만 다닙니다. 이런 날은 에어컨과 냉장고를 발명한 분들이 너무나도 고맙습니다. 이 불볕더위 속에서 지난주 보고 왔던 시원한 바다를 생각하며 더위를 식혀 봅니다. 더보기
제2의 조국 40여명의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 섰다. 대여섯 살로 보이는 아이부터 중년의 어른들까지 앞사람의 얼굴이 뒷사람의 얼굴을 가리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포즈를 취했다. 그들 앞에는 이민 가방을 포함해 크고 작은 짐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굳이 자기 앞에 둔 짐들이 그들의 처지를 대변해주는 것 같다. 무거운 짐 뒤에서 그들은 좀처럼 웃지 않는다. 1982년 5월20일, 베트남 난민 중 41명이 서울역에 도착했다. 부산 난민보호소에 수용됐던 이들은 세 차례에 걸쳐 부산항으로 들어온 베트남 난민 168명 중 일부였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이들은 전 재산이었을 이민 가방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들이 머물던 부산 난민보호소는 1977년부터 1993년까지 재송동 1008번지에.. 더보기
양주관아 양주시청 앞 사거리에서 파주로 이어지는 서쪽도로로 조금만 가면 우측으로 누각이 있는 커다란 한옥 대문이 눈에 들어온다. 외삼문으로 불리는 이 대문 좌우에 낮은 담장이 크게 둘러져 있고 그 뒤로 여러 채의 한옥 건물들이 군집되어 있다. 지난 4월 복원을 마치고 일반에 개방된 양주관아이다. 양주관아는 조선 중종 때인 1506년 현재의 위치에 설치되어 1922년 의정부에 있는 양주군청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417년간 경기도 제1의 도시이자 경제, 군사, 교통의 요충지였던 양주목을 관할하던 곳이다. 양주는 수도 한양을 방위하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조선시대 지방행정단위인 목, 부, 군, 현 중에 가장 큰 목으로 지정되었다. 고려 태조 때 현재의 서울 강북지역인 한양군을 양주로 개칭한 데서 유래하여 조선이 한양으로.. 더보기
노동자의 가면 모나미 볼펜을 손에 들고 서류를 검토하거나 자를 대고 표를 그리는 모습이 생경하다. 책상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컴퓨터가 없는 사무실의 모습은 어색하다. 그러나 이 사진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직원들이 가면을 쓰고 일하는 모습이다. 넥타이를 맨 양복차림에 가면을 쓰고, ‘요구관철’ 구호가 적힌 머리띠까지 한 모습은 이상하다 못해 괴기스럽다. “배격한다! 우리는 횡포 기업주를.” 1971년 한국전력 노조원들이 내건 노동운동 슬로건이었다. 이른바 ‘관료자본주의시대’로 일컬어졌던 박정희 시대에는 기업주들이 관을 등에 업고 노동자들에게 부당한 횡포를 자행했다. 근로기준법이 존재하면서도 노동자들이 무단해고, 불법 연장노동, 임금체불 등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권력은 ‘경제발전’이라는.. 더보기
물속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무섭습니다. 몸이 붕 떠서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물속 풍경은 참 아름답습니다. 알록달록 예쁜 색들의 물고기와 이름 모를 바다생물들. 그러나 아름답다고 느끼기보단 두려움이 더 큽니다. 밑으로 밑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서 못 올라올 거 같습니다. 몸에 힘을 빼야 물에 뜬다고 하는데,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그냥 손발을 허우적대고만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유롭게 웃으며 물속 풍경을 감상하는데, 전 살기 위해 물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더보기
뾰족한 상대성 10여년 전, 기술 덕분에 아주 빠른 속도로 정보, 지리, 경제, 문화, 정치의 벽이 무너지고 있으므로, 세계는 평평할 뿐 아니라 더욱 평평해질 거라고 한 토머스 프리드먼의 말은 여전히 유효할까. 그는 평평한 세계에서 경쟁자들은 공평한 기회를 획득하고, 가치는 수평적으로 창출될 것이라고 했다. 경제 분야의 경쟁은 평등해질수록 치열해질 테니까, 개인의 경쟁력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어떤 학자들은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는 세상의 면면을 언급하면서 세계는 둥글고, 뾰족하고, 울퉁불퉁하다고 했다. 130여년 전, 에드윈 애벗은 2차원의 납작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플랫’한 세상 속에 사는 이들은 직선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신분이 높을수록 오각형, 육각형 등 더 많은 각을 갖고 있.. 더보기
장면의 단면 순간 오래된 것이 허물어지고, 순간 새로운 것이 자리잡는 도시의 역사는 깊다. 그러한 변화의 파도에 따라 순간 오래된 세대가 밀려나고, 순간 새로운 세대가 밀려드는 도시의 층위는 넓다. 이처럼 깊고 넓기에 인간의 맨눈으로 도시의 역사와 층위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얇고 납작한 사진의 표면 안에 도시를 가둘 때, 그렇게 기계의 눈을 빌리면 깊고 넓은 도시의 단면이 한눈에 잡히기도 한다. 물론 찍은 사람도 보는 사람도 도시를 면밀하게 관찰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진가 이재욱의 ‘뉴타운’(2014-2015) 연작 중 한 작품은 도시의 단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전경에는 무언가 새로운 걸 만드는 건설 현장이 보이고, 그 뒤로는 오래된 주택가의 저층 건물이 보인다. 또 뒤로는 십수 년 .. 더보기
생각 그리고 행동 머릿속에선 항상 생각을 합니다. 멋진 아이디어가 막 떠오릅니다. 기억해 놓기도 하고, 메모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뿐.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합니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해 놓고 귀찮아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생각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 저거 내가 생각했었던 건데 저 사람이 먼저 해버렸네….” 늘 후회만 합니다. 머릿속 생각들을 가지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면, 전 지금 유명하거나 부자가 되었을 거 같습니다. 더보기
양주향교 양주시청에서 파주 방향으로 이어지는 98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1.5㎞ 정도를 달리면 우측에 양주시가 자랑하는 문화유산 세 곳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로 최근에 복원을 마친 양주관아가 도로에서 곧바로 눈에 띈다. 나지막한 담장 가운데 누각이 있는 커다란 외삼문이 양주관아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두 번째는 관아 우측에 위치한 국가무형문화재인 양주 별산대놀이 놀이마당이다. 둥근 지붕 위로 마스트들이 뾰족뾰족 올라와 있는 독특한 조형을 하고 있다. 세 번째는 이 놀이마당의 우측에 위치한 양주향교이다. 450년이란 긴 세월을 지켜온 커다란 느티나무와 이 나무 가지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전통건축물의 모습이 멋진 구도를 연출해 낸다. 조선시대 이 지방의 중등 교육기관이었던 양주.. 더보기
지지와 규탄 1987년 12월12일, 앰배서더 호텔과 태극당이 보이는 동국대학교 정문 앞 도로. 사람들의 행렬이 줄지어 있다.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든 사람들은 같은 무리로 보이지만, 크게 두 부류로 갈라진다. 한쪽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종필 후보를 지지하는 시민들 그리고 다른 쪽은 12·12 반란주범 규탄대회 참가자들로 김종필 후보의 유세 활동을 방해했다. 당시 13대 대통령 선거전 초반에 12·12 사태가 주요 쟁점으로 등장했다. 12·12 반란주범 규탄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12·12는 노태우를 비롯한 일부 정치군인들이 정권욕에 사로잡혀 일으킨 반국가적, 반민주적 행위”라고 규탄했다. 그런데 12·12의 전철은 5·16이며, 김종필은 5·16의 주역이기 때문에 규탄의 대상은 노태우와 김종필이 서로 겹쳐진다... 더보기
휴가 휴가를 떠납니다. 일상에서의 복잡한 생활은 잠시 멈춰두고 재충전을 위하여 떠나봅니다. 그러나 재충전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뜨거운 태양과 낯선 환경과 복잡한 사람들 속에서 더 피곤을 느끼고 돌아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떠나봅니다. 똑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환경에서 또 다른 나를 찾으러 떠나봅니다. 더보기
날다 내 곁에 있었던 다정한 친구들과 함께 자유롭게 날아봅니다. 장난감 병정과 뒤뚱거리는 로봇, 그리고 푹신한 곰돌이 인형까지.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마음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훨훨 날아봅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정들었던 친구들과 헤어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바람 따라 날아봅니다. 그렇게 날아가다 보면 지구는 둥그니까 온 세상 친구들을 다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보기
빌보드 별곡 거리를 걷다가, 도로에서 운전 중에 스쳐지나가는 옥외광고판은 우리가 바라보는 도시 풍경의 한 부분처럼 자리잡았다. 언제나 도시 풍경 속에서 배경처럼 묻혀 있던 옥외광고판이 카메라 앞에 정면으로 나타나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진가 조재무의 연작 ‘빌보드 별곡’은 전국 각지에서 옥외광고판을 촬영한 것이다. 지하철 입구의 작은 광고판에서 거대한 빌딩 옥상의 대형 광고판까지 각양각색의 옥외광고판을 모았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모두 광고가 없는 빈 광고판이라는 것이다. 텅 빈 여백만 가득하거나 ‘광고 문의’라는 글자만 덩그러니 남은 옥외광고판은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왠지 초라해 보인다. 옥외광고는 고대 이집트에서 노비매매를 위한 공고로 사용됐을 만큼 역사가 깊다.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에서 간판광고로 추정되는 .. 더보기
가나아트파크 양주시 장흥 골짜기 초입에 들어서면 ‘장흥문화예술특구’라는 커다란 도로표지판이 시선을 가득 채운다. 특구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문화예술시설들 가운데 이 골짜기의 정체성을 결정짓게 한 곳은 초입에 있는 가나아트파크일 게다. 1984년 가나아트파크의 전신인 토탈미술관이 문화예술공간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골짜기에 자리 잡았다. 이 미술관은 1980년대에 많은 젊은 연인들이 기차를 타고 장흥역에서 내려 즐겨 찾던 곳이다. 다양한 조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커피숍에서 마음에 드는 머그컵을 골라 커피를 주문한다. 커피를 마시고 난 뒤 빈 머그컵을 자신이 가지고 오는, 재미있는 추억을 간직하게 하는 교외의 미술관이었다. 2006년 이 미술관을 가나아트센터가 인수하게 된다. 가나아트센터는 이 미술관 명칭을 장흥아트파크.. 더보기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먼지가 생명을 위협하는 날. 건물이 허물어지는 날. 다리가 무너지는 날. 배가 가라앉는 날. 그런 날들이 올 것을 누가 알았을까. 전조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균열은 사소하게 출발하고, 균열은 마치 처음인 양 반복되었다. 부조리를 인내하는 날들의 끝에 있는 것은 절망이었다. 2016년 겨울을 광화문에서 보내며 송주원은 인간의 안일한 태도가 이 사회에 큰 사건과 상처를, 위험과 공포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아무것도 반성하지 않는 가운데,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는 시인 김수영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작가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나의 삶에서 ‘반성이라는 것’을 언제 했던가. 제대로 한 적은 있던가. 절망의 날들을 보내던 그해 겨울, 작가는 이 질문을 안고 작업을 .. 더보기
잊힐 기억 태극기 아래 대규모 인파가 운집했다. 옹기종기 모여 현수막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개미 떼 같다. 그들은 일제히 중앙에 자리잡은 흰색 연단을 향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인 것일까? 사진을 확대해 보면, 연단에 ‘상기하자 6·25’라고 쓰여 있다. 그 위에 ‘6·25 반공궐기대회’라는 문구도 보인다. 1974년 6월25일 오전 10시, 6·25를 맞아 한국반공연맹 주최로 북한의 대남적화야욕을 분쇄하기 위한 ‘6·25 반공궐기대회’가 열렸다. 이날 여의도 5·16광장에 무려 백만 인파가 몰렸다. 이제 남북 정상, 북·미 정상이 차례로 만나서 악수를 나누는 마당에 반공의식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하지만, 당시에는 학생들을 반공궐기대회에 강제 동원했던 시절이다. 유시.. 더보기
내 마음 깊은 곳 겉모습은 이제 어른이 되어 버렸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어린 시절의 내가 있습니다. 힘들 때, 즐거울 때, 그냥 생각이 날 때, 한 번씩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어린 시절의 나를 꺼내 봅니다. 이런저런 즐거웠던 어린 시절을 다시 돌이켜보면서 새로운 힘을 얻어 갑니다. 지금도 내 마음 깊은 곳엔 내가 원하면 언제나 찾아오는 행복한 내가 있습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