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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분노의 이유는 감정이 아니라 참여의 의지라고 했다. 분노를 단념하지 않아야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분노해야 행복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아낌없이 분노했다. 운전기사, 경비원, 가사도우미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행을 쏟아내며 분노했다. ‘분노조절장애’라는 병명을 내세우니 그들의 ‘분노’에 불이 붙었다. 그는 포스터 속 여성의 눈빛에 분노했다. ‘더럽고’ ‘개시건방지고’ ‘찢어버리고 싶은’ 눈빛을 파내니 그들이 분노했다. 그는 계산하는 편의점 직원에게 분노했고, 느리게 가는 장애인에게 분노했고, 뛰어노는 어린이에게 분노했다. 단식하는 정치인에게 분노했고, 토론하는 도지사에게 분노했다. 그리고 그는 최저임금 인상에 분노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시인은 분개했다. 설렁탕집 주인에게, 야경꾼에게.. 더보기
시선의 갑질 이 사진은 요즘 논란의 대상이 된 선거 포스터의 원본이다. 녹색당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를 찍은 이 사진은 패션 사진가 김현성이 촬영했다. 이 사진 위에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는 문구를 더하고 배경을 녹색으로 바꿔 선거벽보가 완성됐다. 이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당당하고 세련된 느낌이라는 호응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불편하다는 시선도 있다. 그중에서 박훈 변호사는 페이스북에 격렬한 반응을 올려 구설에 올랐다. “아주 더러운 사진” “개시건방진” “찢어 버리고 싶은” 등의 표현을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진만 놓고 보면, 그런 격한 반응이 수긍될 정도로 도발적이지 않다. 상반신에 반측면 얼굴을 담은 전형적인 인물사진으로, 우리가 평소 자주 접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선거벽보 사진은 불특정 다.. 더보기
외모 보이는 것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모두들 남들에게 보이는 것에 신경을 씁니다. 인스타그램에는 화려한 일상이 매일 올라옵니다. 커피를 마시고, 쇼핑한 것을 보여주고, 맛있는 음식 사진과 멋진 휴양지 사진을 올립니다. 멋지게 꾸미고 연예인처럼 사진을 찍습니다. 모두들 부러워하며 ‘좋아요’를 누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사람을 현실에선 만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자기 자신을 현실에서 만날 수 없습니다. 더보기
장욱진미술관 외곽순환도로 송추IC에서 내려와 고양시 방향으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우측에 장흥계곡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난다. 잠시 직진을 하면 ‘장흥문화예술체험특구’라고 쓰인 커다란 표지판이 도로 위로 불쑥 드러난다. 이름에 걸맞게 청암민속박물관, 장흥아트파크, 송암스페이스센터,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장흥조각공원, 장흥조각아틀리에, 장흥자생수목원 등 다양한 문화예술 시설들이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다. 1984년 이 골짜기 초입에 지금의 가나아트파크의 전신인 토탈미술관이 처음 자리를 잡았다. 전원에 넓은 부지를 활용한 토탈미술관의 조각공원 덕분에 장흥은 단순한 계곡을 낀 유원지 차원을 넘어 예술과 낭만이 넘치는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골짜기를 찾으면서 주변에는 다양한 카페와 먹거리, 즐길거리들.. 더보기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불법 이민자 신분으로 뉴욕에 체류하고 있었던 대만 출신 작가 테칭 시에는 집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는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살고 있던 맨해튼 아파트에 출퇴근 기록기를 설치한 뒤 매시 정각에 출근카드를 찍고, 기계 옆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잿빛 유니폼 차림이었다.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을 기록하던 이 기계는 예술가의 예술 활동을 냉정하게 관리 감시한 끝에 예술 작품이 되었다. 이 퍼포먼스는 1980년 4월11일을 시작으로 1년간 이어졌다. 365개의 펀치 카드, 365개의 필름 스트립이 쌓였다. 삭발한 채 시작한 이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 그의 머리는 장발이 되었다. 1년간 그는 50분 이상 아파트를 떠날 수 없었다. 50분 이상 잠들 수 없었다. 1년은 8760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133장.. 더보기
모두들 자기만의 집을 원합니다. 초록 잔디가 깔린 마당에 높다란 지붕과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커다란 창문들. 그리고 일층은 거실과 부엌, 이층은 침실과 작업실, 천장에 달린 창문으로 하늘이 보이는 다락방은 아이들 방, 넓은 앞마당에선 아이들과 강아지가 뛰어놀고, 뒷마당엔 다양한 채소가 자라고 있는 집. 상상만으로는 참 멋진 집이지만, 현실에서는 모두들 학군과 교통, 환경 좋은 곳에 있는 집을 원하고 있습니다. 더보기
분노의 거리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다. 어느 한국인이 프랑스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에서도 한국에서처럼 열심히 일했다. 누구보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스스로 야근까지 하면서 말이다. 한국에서 몸에 밴 습관 탓이리라. 이를 지켜보던 동료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피흘려 얻어낸 우리의 노동권을 침해하고 있어.” 프랑스 동료의 말처럼, 노동자의 권리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어제가 있었기에 오늘날 ‘1일 8시간’ 노동 환경이 마련되었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의 투쟁과 희생 덕분에 지금 당연하게 요구하는 노동자의 권리가 실현된 것이다. 최근 최저임금법 개악이 매우 씁쓸한 이유는 그동안 치열한 투쟁으로 확보한 노동자의 권리가 후퇴.. 더보기
형세 인간계는 복잡하다. 쉬운 길을 어렵게 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어찌나 얽혀 있는지, 하나의 에피소드가 엉뚱한 곳에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미국 만화가 루브 골드버그(1883~1970)는 아주 간단한 일도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해결할 수 있는 장치를 다룬 만화로 인기를 끌었다. 생김새도, 작동원리도 한없이 복잡하고 심오해 보이지만, 결국 하는 일은 냅킨을 흔들거나, 우산을 펼치거나, 등을 긁는 정도다. 효율성 제로의 ‘골드버그 장치’를 고안해, 복잡하게 머리 굴리며 살아가는 인간 세상을 풍자한 그는 원자폭탄의 위협을 다룬 카툰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가 고안한 비효율적 기계는 “최소의 결과를 얻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는 인간”의 행동방식을 비판하면서 등장했지만, 그의 의도는 살짝 빗나가 인간.. 더보기
대화 문자로만 대화하다가, 갑자기 전화로 대화하려면 참으로 어색합니다. 전화로만 대화하다가, 직접 만나 얼굴 보면서 대화하는 건 더더욱 어색합니다. 그렇게 만나 같이 식사라도 하게 되면, 어떻게 끊김 없이 대화하며 식사할지 고민입니다. 이런 어색함이 싫어서, 점점 말은 줄어들고, 손가락은 바빠집니다. 더보기
러브 라이프 감은 눈처럼 새까만 창문의 숫자를 세어본다. 아무리 세어봐도 창문에 불빛이 켜질 기미는 없다. 물 먹은 눈처럼 번진 간판의 흔적을 따라 그려본다. 아무리 그려봐도 글자를 읽을 수는 없다. 끝내 불빛이 켜지지 않는 창문은 씁쓸하다. 아무도 기다려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끝내 읽을 수 없는 흔적은 서글프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 있는 건물은 아무 말이 없다. 깊은 밤처럼 점점 어둡게 번지는 쓸쓸함과 서글픔 사이에서 알파벳 글자 ‘LOVE LiFE’가 기묘하게 제 몸을 뒤튼다. 사진 속의 전일빌딩은 모두 185개의 총탄 흔적을 몸에 지닌 채 광주 금남로에 서 있다. 이곳에서 3차례 조사를 마친 국과수는 총탄 흔적을 분석해 “헬기 사격이 유력하.. 더보기
기산저수지 안상철미술관 외곽순환도로 송추IC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이어지는 왕복 2차선 도로로 접어든다. 골짜기를 지나는 도로를 따라 고개 하나를 넘으니 왼쪽으로 장흥관광지를 경유하고 올라오는 도로와 합쳐진다.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또 하나의 고개를 넘으면 왼쪽으로 길게 놓인 저수지를 만나게 된다. 양주시 백석읍 기산리에 위치한 기산저수지이다. 멋진 풍광 덕에 주변에는 음식점과 카페들이 줄지어 있다. 그 가운데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도로변에 ‘안상철미술관’이라 씌어 있는 입간판이 차를 멈추게 한다. 성신여대 예술대 학장을 역임한 안상철(1927~1993)의 작품과 다양한 기획전시가 이루어지는 미술관이다. 안상철은 실험적인 한국화에서 시작하여 서양화의 기법을 접목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경주해 왔다. 젊은 시절 그는 ‘국전.. 더보기
세이프 컨덕트 공항 검색대 앞에 서면 분주하다. 일단 검색대 트레이 안에 가방을 놓는다. 이때 노트북과 액체류는 따로 꺼내야 한다. 재킷을 벗고, 허리띠를 빼고, 시계를 풀고, 때로는 신발을 벗는다. 몸에 지닌 어지간한 쇠붙이는 모두 꺼내 놓은 뒤 검색대 게이트에 들어선다. 양팔을 위로 들고 서 있으면, 기계가 나를 한 바퀴 스캔한다. 그 사이 검색대 위 나의 짐도 스캔 당한다. 어디론가 누군가를 향해 위협을 가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비로소 나는 목적지로 향할 수 있다. 틀에 박힌 시간, 소셜 미디어에 의해 결정되는 자아의 모습을 탐색하면서 기술이 매개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이슈를 다루어 온 에드 앗킨스는 공항의 검색대 앞에서 안전함을 증명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절차가 백인 서양 남성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더보기
미궁 기억날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고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더 찾아보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분명 알고 있는 것인데, 분명 말할 수 있는데, 입에서 맴돌다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머릿속에서 계속 헤매고 있습니다. 더보기
꼭꼭 숨어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만약 사진 속에서 누군가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림자 밑에 매복한 군인들이 달려나오는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상상은 곧 소리로 바뀐다. 달려가는 군인의 거친 군화 소리, 휙 개머리판을 내리치는 소리, 퍽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으악 차마 끝까지 못 내지른 비명, 푹 맥없이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 입이 없는 사진에서 이렇게 처참한 소리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 소리가 잦아들 때, 이미 창백한 흑백사진은 흥건한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1980년 5월27일 광주 충장로에서 찍힌 사진이다. 손글씨처럼 투박한 간판을 살펴보면, 오락실, 당구장, 고전 음악실, 생맥줏집 등 이곳은 젊은이들의 거리로 짐작된다. 저 멀리 삼복서점 간판까지 보일 정도로 .. 더보기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못하겠다 마음이 슬프면 몸짓이 슬퍼지는 걸까, 슬픈 동작이 슬픈 마음을 가져오는 걸까. 카메라 앞에 앉은 바스 얀 아더르는 슬퍼하기 시작했다. 슬픔의 종착역은 눈물인 모양이다. 그는 울기 위해 집중했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는 눈을 감고, 입술을 오물거리고, 볼을 찌푸렸다. 손으로 머리칼을 휘젓고, 눈꺼풀을 문질렀다. 슬픈 제스처로 슬픈 감정을 끌어올리는 사이사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살짝 턱을 들어 올리고 슬그머니 눈을 뜨는 순간 그의 표정에서는 불현듯 슬픔이 사라졌다. 그는 계속 슬퍼했지만, 곧바로 충분히 슬퍼지지는 않았다. 슬픔의 동작이 커지면서, 드디어 그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성인 남성의 눈물을 볼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 소리 없는 흑백 영상 속에서 그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오열 사이사이 한숨.. 더보기
웃으면 복이 올까요? 웃으면 복이 온다니 오늘 한번 활짝 웃어 봅니다. 뭐 좋은 일 있냐? 처음엔 사람들도 살짝 미소로 답해줍니다. 그러나 점점 반응이 이상해집니다. 너 왜 나보고 웃냐? 내가 우습게 보이냐? 뭐 묻었나? 뭐가 잘못되었냐? 나도 그들도 모두 웃음에 어색해합니다. 웃었더니 복은 오지 않고, 어색함만 잔뜩 와버렸습니다. 더보기
장면의 단면 연두색 철 펜스 위에 남과 북 두 정상의 얼굴이 나란히 걸려 있다. 불과 몇 달 전이었다면 한 프레임 안에 함께하는 모습 자체가 비현실적이거나 납득할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제3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실제로 만나기 전부터, 각 언론사에서는 역사적인 만남을 예견하는 자료사진이 보도됐다. 판문점을 배경으로 두 정상이 함께 있는 이미지는 생경하게 다가왔다.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순간을 합성해 만들었다는 사실보다 그런 만남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4월27일, 남과 북의 두 정상이 만났던 꿈같은 하루는 현실로 생중계되었다. 모든 국민들은 두 사람이 서로 만나 악수하고 농담을 나누며, 가볍게 군사분계선을 뛰어넘고 함께 종전을 선언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았다.. 더보기
숲속의 섬 고양시편을 마무리하면서 꼭 찾아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백마역 옆에 있었던 ‘화사랑’이라고 하는 카페이다. 1980년대에 많은 젊은이들이 신촌역에서 경의선에 몸을 실어 40분 남짓 거리에 있는 백마역에 내렸다. 백마역에서 5분 거리, 철길 우측에 위치한 화사랑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림이 있는 사랑방’이라는 의미의 ‘화사랑’이라는 이름의 이 카페는 주인장의 여동생 김애자씨가 시낭송회나 음악회 등의 다양한 예술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많은 젊은이들의 낭만과 정신을 담는 공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내가 박사과정 때인 1980년대 후반. 문화운동을 한답시고 백마역의 화사랑을 예로 들며 주변사람들을 설득하곤 했었다. 지금도 지역에서 문화운동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예술활동의 성공 모델로 화사랑에 .. 더보기
다이얼 히스토리 구름 사이를 가로지르며 비행기는 서서히 하강 중이다. 영상에 맞춰 흐르는 잔잔한 클래식 선율에 취해, 늘 그렇듯 평화로운 비행과 여행의 마무리를 예감한다. 멀리 보이는 활주로에는 안전한 착륙을 도와줄 조명등이 길을 밝힌다. 착륙 중인 듯 비행기 조종석이 조금씩 흔들리고, 뒤편에서 문득 불꽃이 번져 나오더니 조종석이 폭발한다. 비행기는 폭발했다. 미디어가 어떻게 비행기 납치 사건을 묘사해왔는지에 대한 역사를 추적한 ‘다이얼 히-스-토-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벨기에 출신 작가이자 영화감독 요한 그리몬프레즈는 뉴스, 영화, 홈비디오 클립 등에서 발췌한 장면들만을 모아 경쾌한 편집으로 하이재킹 연대기를 완성했다. 작가는 돈 드릴로의 소설 가운데 기술을 맹신하는 현대인들의 현실을 비판한 와 소비자본주의 사회 속.. 더보기
자리 의자뺏기 게임을 합니다. 게임을 할 때마다 사람도, 의자도 하나씩 없어집니다. 점점 불안해집니다. 다음 게임에서도 나의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을까? 떨어진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쉬지 않고 나의 자리를 찾아서 게임을 해보지만, 나의 자리는 언제나 불안합니다. 정말 나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기는 한 걸까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