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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맣게 태워도 세 명의 청년이 오른팔을 들고 구호를 외친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는 사진은 대신 벽에 적힌 구호를 보여준다. “노조인정”, 글자 아래에는 창업주로부터 80년간 ‘무노조경영’ 방침을 이어온 회사의 이름이 보인다. ‘삼성’, 한 글자는 이미 새까맣게 타버렸다. 1989년 1월19일 서울 삼성본관에서 노조인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 소속 노동자 5명과 고려대 등 8개교 대학생 20명은 낮 12시부터 삼성본관 3층 베란다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들을 해산시키려고 경찰이 접근하자 삼성중공업노조 홍보부장 변성준 등 5명은 극약을 먹거나 몸에 시너를 뿌리고 극렬하게 반항하다 경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제 시간이 흘렀고, 세상은 조금 더 나아졌을 테니 극약을 먹거나 시너를 뿌리는 등의 .. 더보기
지구는 평화 평화란 무엇인가. 질문은 간단하지만 대답은 간단하지 않은 이 주제를 안고, 2017년 프랑크푸르트의 쉬른미술관은 ‘평화’전을 열어 우리 생활 속에서 평화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평화의 역사는 인류 자체만큼 오래 되었습니다. 전쟁은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되는 데 반해, 평화는 뭔가 허약해 보입니다. 언론에 전쟁과 폭력은 수익성을 보장하는 사건이며, 정치인들에게도 중요한 관심 대상입니다. (…) 전시회 ‘평화’는 평화로운 삶과 평화를 향한 다른 접근법을 제안하고자 합니다”라고 언급한 큐레이터 마티아스 울리히는 평화를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을 비롯해 생태계에 관련된 모든 것들 사이의 상호 작용과 의사소통의 과정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인간을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물.. 더보기
미소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닙니다. 울고 싶지만 울 수도 없습니다. 화를 내고 싶어도, 인상을 쓰고 싶어도, 내 마음을 밖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착한 사람’의 얼굴로 또는 ‘을’의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하루를 보냅니다. 더보기
흥국사 약사전 언덕에서 외곽순환도로 송추IC를 빠져나와 서울 방향으로 접어든다. 전면에는 북한산의 높은 봉우리들이 반갑게 펼쳐진다. 나지막한 경사로를 넘어 내리막길에 접어드니 탁 트인 시야에 왼쪽의 북한산, 오른쪽의 노고산이 만들어내는 골짜기 도로의 멋진 조망이 나를 기다린다. 스쳐 지나가는 우측의 노고산 예비군 훈련장을 보니 오래전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왔던 옛 추억이 떠오른다. 경사로 끄트머리에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오늘도 산에 오르려는 많은 등산객들이 진입로 초입부터 부산하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500m가량 더 내려가니 우측에 ‘흥국사’라는 돌 팻말이 보인다. 좁은 2차로를 따라 주택가를 잠시 지나치니 곧 좌우로 나무들이 빼곡히 둘러싼 숲길로 접어든다. 행정구역상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에 위치한 흥국사 입구.. 더보기
미소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닙니다. 울고 싶지만 울 수도 없습니다. 화를 내고 싶어도, 인상을 쓰고 싶어도, 내 마음을 밖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착한 사람’의 얼굴로 또는 ‘을’의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하루를 보냅니다. 더보기
예술가와 갈등 2016년 콜롬비아 대통령 후안 마누엘 산토스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지도자 로드리고 론도뇨와 평화협정에 서명하여, 52년간 22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콜롬비아 내전 종식의 가능성을 열었다. 하지만 국민투표 결과, 협상안은 부결되었다. 그래도, 산토스 대통령은 콜롬비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한 공을 인정받아 376명의 후보 가운데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택되었다. 평화협상이 부결되자, 콜롬비아 국민들은 국가의 평화 협상 추진을 지지하기 위해 거리에 모여들었다. 콜롬비아 출신으로, 명성이 높은 국제적 예술가 도리스 살세도는 3500명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내전의 희생자 2300명의 이름을 재 가루로 흐리게 써넣은 천 조각을 꿰매 볼리바르 광장을 뒤덮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천의 길이는 7000m에 달했다... 더보기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요? 너무 가까워도 부담스럽고, 너무 멀어도 서먹해지고, 이 사람과 가까이 있으면 저 사람이 싫어할 거 같고, 다 같이 가까이 있으면 모두 다 힘들고, 모두 다 떨어져 있으면 모두 다 외롭고,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찾는 일이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더보기
컵의 숫자만큼 이 사진은 매우 무섭고 섬뜩하다. 테이블에 놓인 수저통과 양념통, 주전자, 양옆의 컵까지 모두 무섭다. 뒤에 걸린 태극기와 양옆에 쓰인 ‘자조’, ‘자립’이라는 단어 또한 섬뜩하다. 도대체 이것이 왜 무섭고, 섬뜩하단 말인가? 사진 속의 이곳은 형제복지원의 식당이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은 1960년대 문을 열어 1987년까지 3164명을 수용했던 전국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다. 불법감금과 강제노역, 구타와 고문이 자행됐던 이곳에서 513명이 사망했다. 사진 속에 가지런한 도구들은 513명에서 3164명까지 악몽을 겪었을 그들의 존재를 각인시켜준다. 단지 숫자가 아니라 식당에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고 물을 마셨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저 많은 컵만큼, 저 커다란 식당을 채웠을 만큼 누군가가 존재했.. 더보기
사이의 무게 물기 먹은 바닥에서 팔과 다리가 돌과 물병에 붙잡힌 비닐 우의는 사람의 허물 같다. 바람이 불자 투명한 허물은 진짜 사람이 숨을 내쉬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신기하게도 그 어떤 무생물도 숨을 쉬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숨을 멈추면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숨이 있고 없고, 이 얄팍한 차이로 삶과 죽음의 아득한 간격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판가름된다는 것은 꽤 아이러니하다. 사진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지만 숨을 쉬는 몸뚱이는 역설적으로 살아 있었지만 숨을 멈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이민지의 ‘라이트 볼륨’ 연작에서 작가의 시선은 숨이 있고 없고, 그 사이와 차이에 머문다. 그 눈길은 마치 ‘혹시 숨을 쉬지 않는 걸까’ 싶어 코 주위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는 마음과 .. 더보기
춘곤증 언제나 피곤하고, 밥 먹고 나면 졸리고, 입맛도 없고 소화도 안되고, 의욕도 없고, 짜증만 납니다. 춘곤증인가 봅니다. 겨울 동안의 몸이 따뜻한 봄에 적응하지 못해 생기는 증상이라고 합니다. 4월이지만 여름처럼 더웠다가 밤에는 눈발 날리고 태풍 같은 바람이 붑니다. 아직도 우리는 겨울과 봄과 여름 사이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더보기
호수공원의 벚꽃 올해 꽃샘추위가 유난한 것 같다. 4월도 깊이 들어왔는데 난데없는 함박눈까지 내려 계절이 거꾸로 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꽃샘추위라도 다가오는 계절을 막을 수는 없으리라. 남쪽에서는 벌써 벚꽃축제도 끝났다 한다. 이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곳에 따라 벚꽃이 절정에 다다를 것 같다. 때늦은 꽃샘추위를 이겨낸 일산 호수공원의 벚꽃들도 이제 그 자태를 마음껏 뽐낼 것이다. 1992년에 준공된 일산신도시는 ‘예술과 문화시설이 완비된 전원도시’ ‘자급자족의 기능을 갖춘 수도권 서부의 중심도시’ ‘남북통일의 전진기지’ 등의 목적을 가지고 조성됐다. 도시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조성된 호수공원은 일산신도시 계획의 주된 도시계획적 요소이다. 스위스 남부 제네바에 있는 레만 호수를 모델로 구상된 이 호수공원은.. 더보기
반복 해가 뜨고 지는 일, 눈을 뜨고 감는 일,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일, 전원을 켜고 끄는 일, 일어나고 잠드는 일,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 꽃이 피고 지는 일, 계절이 오고 가는 일, 만나고 헤어지는 일, 달이 차고 기우는 일, 태어나고 죽는 일, 새것이 낡아가는 일. 나는 소소한 일, 거대한 일이 촘촘하게 반복되는 세상에 파묻혀 살고 있다. 전통을 거부하는 일이 전통인 예술계에서, 작곡가 스티브 라이히가 음악의 전통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선택한 것은 지독하게 단순한 반복이었다. 반복되는 악절을 일치시켰다가 어긋나게 만들고 다시 일치시키는 전개가 되풀이되는 그의 음악은 진부하거나, 지루하거나, 기존 체계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법한 정도의 혁신이었다. 벨기에를 떠나 뉴욕 유학길에 올랐던 무용수 드 케이르스마.. 더보기
세상이 바뀔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오른팔을 들어 팔뚝질을 한다. 사진에서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바라보면 함성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의 불끈 쥔 주먹과 구호가 향하는 곳은 ‘한열이를 살려내라’고 적힌 커다란 걸개그림이다. 큰 규모의 시위나 집회, 장례 행렬마다 대형 걸개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모인 연유를 시각적으로 요약하는 걸개그림의 모티프는 대부분 사람들의 기억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사진에서 비롯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한열이를 살려내라’가 그랬고,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의 ‘노동해방도’도 그랬다.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어머니 영정을 끌어안은 상주 전태일의 모습이 담긴 걸개그림이 앞장섰다. 단순히 현장을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진이 투쟁의 현장에서 구심점.. 더보기
잔머리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대충, 쉽고, 빠르고, 욕 안 먹게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내 머릿속 잔머리들을 굴려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 보아도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괜히 잔머리를 굴렸다간 일을 망칠지 모릅니다. 이럴 때는 그냥 정석대로 일하는 게 최고일 거 같습니다. 더보기
역사를 기억하는 예술 예술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정한 유형의 힘을 알아차리는 데 유난히 밝은 눈을 가진 작가라고 평가받았던 한스 하케는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참여 작가 제안을 받고, 독일관에 축적되어 있는 히틀러의 욕망에 주목했다. 1909년 베니스의 자르디니 정원에 세 번째 국가관으로 자리 잡은 독일관은 히틀러가 추구하는 나치의 미학 원리, 독일 예술의 새로운 정신을 담기 위해 1938년 재건되었다. 로마제국을 넘어서는 거대한 독일제국의 건설을 꿈꾼 히틀러는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으로 도시계획을 추진했고, 베니스의 독일관도 그 맥락 안에서 리노베이션을 마쳤다. 히틀러의 비전을 그대로 투영한 독일관은 패전 이후, 나치즘 시대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참여 작가들의 과제는 독일관이 품어내는 나치의 .. 더보기
다시, 작은 세계 간신히 책의 몰골로 남은 종이 뭉치들이 재처럼 바스라질 것 같다. 영안실의 시신처럼 표본실의 표본처럼 창백한 얼굴을 카메라 앞에 드러낸다. 플래시의 강한 섬광과 함께 방부된 종이 얼굴에서 책의 영정을 떠올린다. 개인전 (갤러리 룩스, ~4월22일)을 열고 있는 권도연 작가가 연출한 장면은 유년 시절의 기억과 연결된다. 어린 시절, 작가의 아버지는 헌책방에서 사온 책들로 집 지하실에 작은 도서관을 꾸며줬다. 작가는 이곳을 자기만의 놀이터로 삼아 내밀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 홍수로 지하실이 침수되는 걸 목격했다. 물이 차오르고 빠져나가는 과정 속에서 뭉개지고 찢어지고 분해된 것은 단지 책만이 아니었다. 현실과 독립된 채 완벽한 문장들로 둘러싸인 작은 세계가 그의 눈앞에서 붕괴된 것이다. 작가는.. 더보기
내 속의 수많은 ‘나’ 내 속에 수많은 ‘나’가 있습니다. 공격적인 나, 착한 나, 게으른 나, 똑똑한 나, 신경질적인 나, 행복한 나, 우울한 나.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내 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한테 짜증내는 사람, 친절한 사람, 웃어주는 사람, 사랑해주는 사람, 화내는 사람, 조언해주는 사람. 수많은 ‘나’와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만나 지금의 ‘나’가 있습니다. 더보기
행주산성 충장사 자유로 행주대교IC에서 바깥 차선으로 서울 쪽을 향하면 곧바로 행주산성 방향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자유로에서 내려오자마자 그 일대는 여기저기 여러 국숫집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국수로 특화된 지역임을 직감케 한다. 호기심 겸 한 국숫집에서 시장기를 해결한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가득 담겨오는 잔치국수는 그야말로 ‘가성비’ 최고이다. 식사 후 다시 차를 몰아 반대편 능선 쪽에 있는 행주산성으로 향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입장료 1000원을 내고 정문을 향한다. 대첩문이라 쓰여 있는 정문을 통과하여 경내로 들어간다. 입구에서 정상까지 나지막한 언덕길로 행주산성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권율 장군 동상, 충장사, 행주대첩 기념관, 덕양정, 행주대첩비, 충의정 등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은 1.6㎞ 정도란다.. 더보기
어떤 속박 건설현장처럼 전시장 곳곳에 툭툭 쌓여 있는 시멘트 벽돌담 너머로 화면 곳곳이 떨어져 나간 대형 모니터가 서 있고, 부서져 나온 모니터 조각들은 전시장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깨진 화면 위로 모델이자 배우로 활동 중인 드리 헤밍웨이의 모습이 보인다. 노란 블라우스를 입은 그는 채광이 좋은 사무실에 앉아 옥수수를 먹는 중이다. 관절재활치료기구(CPM)의 도움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 테이블 위 옥수수에 닿는 것은 영 쉽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옥수수를 입에 넣는 데 성공한다. 옥수수를 씹는 촉촉한 소리와 피아노의 영롱한 선율이 하모니를 이루는 가운데, 어색하면서도 우아한 몸짓으로 옥수수를 먹으면서 간간이 관객을 향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헤밍웨이의 모습은 아름다운 옥수수.. 더보기
로스트 앤드 파운드 표면이 지워지고 부식된 사진 속에 두 사람이 있다.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얼굴에는 코와 입이 지워졌고 눈만 간신히 보인다. 반대로, 다른 이는 눈 주위가 지워졌고 간신히 입만 보인다. 둘은 연인 사이일까, 아니면 부녀일까?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다정한 한때가 담긴 사진은 그들에겐 분명 소중한 추억일 것이다.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 피해지역에서 발견된 사진이다. 자원봉사자들이 재해 현장에서 사진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비록 망가진 사진이지만, 누군가의 추억이기에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사진을 주인에게 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로스트 앤드 파운드(Lost and Found)’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수집된 사진들은 오염물질을 제거하고, 디지털 카메라로 재촬영해 색인파일 시스템으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