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白, 응축된 시간의 색


히로시 스기모토, U. A. 플레이하우스, 뉴욕, 1978(출처: 경향DB)


1970년대 젊은 사진가가 영화를 보다 문득 영화 한 편을 고스란히 사진에 담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관객으로 가장한 채 극장에 들어가 대형 카메라를 고정시켰다. 1920~1930년대에 지어진 미국 극장의 아르데코풍 장식은 화려했고, 관객 수는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드물었다. 그곳에서 그는 영화가 시작할 때 카메라 셔터를 열어뒀다가 영화가 막을 내릴 때 셔터를 닫았다. 무수히 많은 필름들이 돌아가며 스크린 위에 재현시켜 놓은 두 시간 동안의 사건과 사고는 그렇게 그의 필름 한 장에 응축되었다. 사진 속에서 장시간 빛을 쪼인 스크린은 온통 하얀색이 되었다. 대신 어두워서 한눈에 알아볼 수 없던 극장 내부는 구석구석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히로시 스기모토의 대표작 ‘극장’ 시리즈는 이렇게 탄생했다.


시간과 행위를 삼켜버린 히로시의 작품 속 스크린은 새하얗게 질린 것 같기도 하고, 텅 빈 구멍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덧없는 끝이기도 하고 동시에 영원을 향해 가는 불멸의 생명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속에서 백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유기체다. 이렇듯 히로시의 작업은 그의 다른 작업 못지않게 흑과 백, 죽음과 영원 등의 동양적 사유를 담는다.


평생 아날로그 사진을 고집해온 그의 대규모 개인전이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빛에 반응하는 사진의 원리를 활용해 만들어낸 ‘번개 치는 들판’ 시리즈,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바다 풍경’ 등 문제의식이 일관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다양한 작업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극장’ 시리즈는 단연 압권이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지난 칼럼===== > 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치 프로젝트  (0) 2014.02.20
도시의 깊이  (0) 2014.02.13
삼팔선  (0) 2014.01.23
낯선 도시를 걷다  (0) 2014.01.17
경계의 땅  (0) 2014.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