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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삼팔선

 

지영철, 미국 콜로라도 38.00.00, 2013 (출처: 경향DB)

 

 

 

사진은 유령을 찍을 수 없다. 우리의 망막에 포착되지 않는 것은 사진기에도 상을 맺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실재하는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이를테면 삼팔선처럼. 미국과 소련이 군사작전상의 업무 분담을 위해 설정한 이 군사분계선은 지도상의 좌표로만 존재한다. 다만 이런 곳에는 으레 어떤 식으로든 의미심장한 표시가 있다. 38도선이라는 표지석이나 탱크 저지선이 늘어서 있기도 하다.

사진가 지영철은 이 삼팔선을 가지고 고민하는 작가다. 엄밀히 말해 그는 삼팔선을 매개로 이념, 역사 등의 거대한 말들이 시각화되는 방식을 고민한다. 부피도 무게도 갖지 못한 선 하나가 탄생시키는 이념의 공간을 탐구한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삼팔선의 복합적인 풍경들은 삼팔선을 기념하거나 이 선이 여전히 현실에서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지만, 지나치게 초라하거나 너무 비장하거나 혹은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탱크 저지선을 나들이 차림의 연인이 무심히 지나치고, 허공에 매달린 평화라는 영어 단어가 안쓰럽다.

작가는 이 삼팔선의 영향력을 한반도 밖으로까지 찾아 나서 미 대륙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를 기리기 위한 고속도로에 섰다. 그곳의 북위 38도선에도 한반도의 삼팔선을 상징하는 표지판이 있다. 광활한 땅을 횡단하는 고속도로 위에 뜬금없이 서 있는 그 표지판을 마주하는 것은 뭔가 허무하다. 보이지 않는 선 하나가 나라를 갈라놓는 터무니없는 부조리함. 작가를 통해 우리가 만나는 유령이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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