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 강남스타일 말춤 조형물, 삼성동 코엑스 앞, 2016.
기존 공공미술의 목적은 예술 향유 확장, 문화 소외지역 환경 개선 및 지역공동체 화두의 예술적 실천에 있다. 하지만 국가 예산을 사용하는 프로젝트들의 다수는 무엇보다 예술가의 일자리 창출을 중시한다. 정부의 국정과제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1972년 문예진흥법이 제정될 당시 생겨나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건축물미술작품제도’를 비롯해, 오늘날 여러 지자체에서 앞다퉈 시행 중인 공공미술 사업 역시 같은 맥락이다. 모두 예술가의 일자리 배양을 통한 소득증대라는 속뜻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는 긍정적인 의도와 투입되는 막대한 세금에 비해 효과는 미미하다는 점이다. 공적 영역은 진입이 까다롭고 민간 건축주가 발주하는 사적 영역에선 미술인들에게 고른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나마 뭐라도 하나 설치하려면 거간꾼들이 이리저리 떼어가는 통에 경제적 이익도 거의 없다.
특히 공공미술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공공의 공간에서 마구잡이로 펼쳐지는 프로젝트들은 그 자체로 예산낭비이기 일쑤이고, 건축주와 이중계약으로 재료비 정도만 받고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은 예술인 소득은커녕 시민들에게 심리적·정서적 고통을 유발하는 작품들만 양산하는 원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처음 공공미술 관련 제도가 만들어진 이후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다.
진정 예술가들을 위한다면 정부와 지자체부터 다분히 정치적이고 형식적이며 전시성이 강한 공공미술 사업을 멈추고 보다 근본적인 복지 마련에 관심을 두는 게 옳다. 예술인 자녀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설립하거나, 예술가 직업전환 프로그램 구축, 예술인연금과 예술인금고와 같이 예술 복지 초석을 다지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문화체육관광부가 10년 전부터 주최하고 있는 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연간 예산 20억원이면 100만원씩 2000명의 미술인들에게 창작비를 지원할 수 있다. 평균 억대를 넘나들지만 조악하기 짝이 없는 상징조형물 하나 세울 돈이면 작가들에게 꼭 필요한 작업실이나 전·월세 지원도 가능하다.
일자리 창출은 시장과 산업이 연계된 관점에서 논의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같은 예산이라도 예술가의 입장에서 실천하는 정책의 변화와 함께 지원방식의 변화 또한 요구된다. 적어도 예술인을 용역으로 전락시키는 환경미화사업을 통한 단발성 일자리 생성은 의미가 없다.
밝고 건강한 문화예술의 미래를 위한다면 예술적 비전과 창작동기 부여, 미적 성과를 제공하는 방향에서의 예술정책이 훨씬 건설적이다. 인심 쓰듯 돈 몇 푼 쥐여주며 머릿수나 채우는 보여주기식 공공미술 사업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pieta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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