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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미술계, 그 답답하고 속상한 풍경

대한민국의 국공립미술관장은 곧잘 부유하는 자들의 몫이다. 비정주적 삶이 일상임에도 자리에 대한 욕망은 고정적이다. 다만 그 욕망에 비례해 과연 그들이 지역과 미술계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성과는커녕 들려오는 소식이라곤 내리고 타기 바쁜 지하철 내부에 포스터 형식의 이미지 몇 점 걸어놓고 “예술의 즐거움과 치유의 시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하는 궤변 따위다. 


폴란드 태생의 작가 마그달레나 아바카노비츠(Magdalena Abakanowicz)의 인체조각을 비롯한 여러 시리즈는 인간의 존엄과 예술의 용기, 신념에 대한 의미적 풍경을 생성한다.


많은 이들이 돈과 시간을 들여 미술관에 가는 것은 ‘예술의 효과’ 때문이다.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예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체감하기 위해서이다. 한데, 국립현대미술관장이라는 이는 그저 또 다른 광고의 하나로 소비될 복제물을 열차 내에 늘어놓곤 예술의 즐거움과 치유의 시간을 말한다. 이미 낡고 흔한 방식을 ‘혁신적인 시도’라고 자평한다. 


그는 약 6개월 전 불공정 절차와 코드 논란 끝에 관장 자리에 올랐다. 미술계 시선을 의식한 듯 “업적은 지금부터 만들어 갈 것”이라며 당찬 포부도 내비쳤다. 그런데 고작 지하철에 그림 복제물을 붙여 놓는 게 혁신적 시도라니. 듣고만 있어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미술관, 말이 나와 하는 얘기지만 그곳에 가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형식의 작품들이 자의식을 상실한 채 맹한 표정을 짓고 있다. 철 지난 ‘양식의 발작기’를 다시 소환해 뒤섞어 놓은 것들, 예술의 종말을 통해 예술이 비로소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던 위대한 유산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대체 섭외 기준은 무엇이고 예술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 것일까.


또 다른 전시공간인 대형 아트페어에 들어설 때마다 접하는 온갖 동물과 예쁘장하게 다듬어진 그림들은 누군가의 지갑이 열리기만을 고대한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어쩌면 당연할 수 있으나, 늘 지적했듯 대중 간택에 호소하는 얄팍한 ‘상품’이 작품인 양 둔갑되어 ‘값’과 ‘가치’의 차이를 희석시키는 장면의 연속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이해는 되지만 측은함이 스미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측은함에 무게를 더하는 건 정부다. ‘예술경영’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의 행정력을 죄책감 없이 소비한다. 혈세를 쏟아부으며 새로운 시장 질서를 만들고 지원, 심사, 평가 등의 명목으로 미술계 구성원들을 줄 세운다. 그들이 경전처럼 대하는 ‘대중예술 향유 확산’과 ‘작가 자생력 확보’라는 명분은 추상적인 반면, 지원금보다 매출이 적은 상황은 꽤나 리얼하다. 그 돈을 예술인 복지나 순수 창작 지원에 얹히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표현과 창조적 가능성도 인정되는 시대임에도 진부함이 재탕되는 현상, 욕망과 욕구가 충만할 뿐 미래를 위한 변화에 둔감한 내적 양태는 한국미술계에서 쉽게 목도할 수 있다. 현대미술 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풍경이다. 그래서 안타까운 건 미술계 지식인들의 행태다. 


그들은 일본 사상가 고소 이와사부로가 말한 경계석을 세우거나 표지를 만드는 최초의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사실상 몇 푼의 거마비와 문제의식을 교환하는 무언의 동조자가 되어 일그러진 미술계를 찬양하고 그 낯설지 않은 풍경의 일부가 된다. 


난 이런 흐름을 접하며 문득 문득 우리는 대체 어떤 길을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자문한다. 자문의 빈도만큼 걱정은 짙어진다. 마음속 가득한 속상함을 토로하기에 이 지면은 너무 좁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