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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변신

상쾌한 저녁 바람을 얼굴로 느끼며 퇴근하는데 정말 고약한 방귀 냄새가 났다. 무취에서 악취까지 0부터 10으로 표현한다면 10점 만점이었다. 불의의 후각 공격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앞을 보니 두 명의 직장인이 아기염소처럼 즐겁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억울했다. ‘거기 방금 방귀 뀌었죠!’라고 항의를 하려니 그 역시 우습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소화기관 내 가스를 의도적으로 배출했다는 증거가 없을 뿐더러, 혐의를 부인하면 그만이었다. 기분은 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맑은 공기를 허파꽈리 깊숙이 들이켜 후, 하고 흘려보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타인의 방귀에 대해 관대해지는 것이다. 볼기 사이로 이산화탄소·수소·메탄 가스가 섞인 기체가 소리를 동반하며 배출되는 생리적 현상을 신기해하는 것은 <방귀대장 뿡뿡이>에 열광하는 연령대의 이야기다. 내 몸이 아직 낯설기에 타인의 생리적 현상에 대해 장난기 가득한 호기심을 갖고 반응한다. 그러다 너도 나도 대장에서 하루에 7~10ℓ의 가스가 발생하고, 점막을 통해 흡수되지 않은 일부를 많게는 20여차례에 걸쳐 배출하지 않으면 겪어보지 않은 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복통이 찾아오는 육신과 함께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익숙해진다. 남의 방귀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았을 때 우리의 예절은 일본 닛코 도쇼구에 새겨진 ‘세 원숭이’ 같은 것이다. 못 본 척, 못 들은 척, 말하지 않기. 이심전심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사회적 신사협정이라 해도 좋다.

이런 ‘약속’이 있기에 출퇴근길 만원 대중교통에서 누군가가 어젯밤 돼지목살과 함께 먹은 생마늘의 흔적이 강렬한 가스를 배출하더라도 차량 내 환기시설의 도움으로 기체 분자가 빠른 시간 안에 확산 및 희석되기만을 점잖게 기다리는 것이다. 너무 심하다 싶어 눈을 흘길 수도 있겠지만 그뿐이다. 방귀 때문에 주먹다짐이 벌어지는 일은 흔치 않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하자 군중이 돌멩이를 내려놓고 흩어진 일화와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신사협정이 지켜지는 것은 그만큼 서로 조심하기 때문이다. 예의는 탁구 경기와 같다. 서로에게 즐겁게 되돌려줄 때 지속 가능하다. 과도한 단백질 섭취로 인한 장내에 황화수소 발생으로 ‘10점 만점’짜리 방귀가 임박했음을 예감하거나, 장기캄보디아에서 태어난 아니다 알리는 어린 시절 크메르루주의 학살을 피해 부모와 함께 미국 시카고로 떠났다. 국민의 98퍼센트가 불교를 믿는 캄보디아에서 아니다의 집안은 무슬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이방인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부모는 각기 말레이시아계와 태국계의 소수 민족 출신이다. 그러니 아니다는 서구에서는 아시아인이면서, 불교 국가에서는 미국 문화에 익숙한 무슬림이다. 길이 40미터에 달하는 특이한 의상을 입고 펼치는 그녀의 작업은 이 혼종의 상태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처럼 보인다.

Anida Yoeu Ali, Buddhist Bug 연작 중, Oxcart Grazing, 2014


그녀가 입는 애벌레 의상은 캄보디아 불교의 상징색인 주황색을 띠지만, 입었을 때의 모양은 이슬람의 차도르와 닮아 있다. 뱀처럼 짧게 똬리를 틀거나 길게 늘어날 수 있는 이 벌레는 모든 장소에 몸의 모양을 조화시킬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곳에서 눈에 두드러질 수밖에 없기도 하다.

작가는 이 옷을 입은 채 미국 대학의 식당부터 캄보디아의 놀이공원이나 버려진 극장까지 다양한 공간을 누빈다. 그녀에게 결코 생경하지 않을 이 모든 장소들은 그녀의 복장으로 인해 낯선 존재감을 발한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혹은 경계하는 시선은 그동안 작가가 마주해 왔던 익숙한 반응들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러한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치 새로운 생명체인 것처럼 자신의 퍼포먼스를 완수한다. 그녀의 변신은 다양한 문화적 혼종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내야 하는 저마다의 실험을 대변한다.간 변비증세를 겪고 있을 때에는 공공장소에서 괄약근이 함부로 느슨해지지 않도록 단속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방귀가 새어나왔을 때는 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고, 세 번 벌어졌을 때는 결례에 대한 해명과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나와 같은 공간을 나누고 있는 타인을 존중하는 몸가짐을 보이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일방적인 인내심을 강요하는 방귀는 위계를 이용한 폭력이다. 시도 때도 없이 사무실 의자에서 한쪽 궁둥이를 들어 ‘뿡’ 하고 방귀를 뀌는 동료와 일하던 지인은 “냄새까지는 참겠다, 하지만 인간적인 모멸감은 도저히 더 이상 못 참겠다”고 토로하곤 했다. ‘방귀깨나 뀌는 집안’이라는 전근대적 표현은 내키는 대로 방귀를 뀌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부와 권력을 가졌다는 뜻일 것이다. 오죽하면 이승만 전 대통령이 독재하던 시절 방귀를 뀌었는데 측근들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며 알랑거렸다는 블랙유머가 나왔을까.

하지만 우리가 타인 앞에서 삼가야 할 것이 방귀뿐만은 아니다.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타인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 원초적이고 배설적인 표현같은 ‘말 방귀’도 가려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습관적으로 혐오 표현을 내뱉는다면 , 아무 데서나 방귀를 뿡뿡 뀌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어른’이 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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