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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서귀포 당근 밭

소소풍경(小小風景). 2007. ⓒ이한구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스님이 밭에서 일하는 모습이라고 얼른 생각했다. 광대무변의 바다 같기도 한 이 풍경을 보고 스님이 떠오른 것은 이 모습이 마치 구도의 자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때려치우고 장사나 하지” 혹은 “농사나 짓지”라는 말을 쉽게 한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장사하는 것’과 ‘농사짓는 일’일지도 모른다. 박사, 의사, 판검사 되기가 힘든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웬만한 환경에서 공부만 힘써서 하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생각하는 ‘장사’는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가져오는 일이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더구나 농사는 온전히 자연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지금은 농사도 기계화와 함께 경제활동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공동체 문화나 질박한 삶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과 함께했을 때일 것이다.


이한구는 서귀포 오름으로 가는 길에 당근 밭에서 일하는 농부를 지나쳐갔다.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 농부를 마주한다. 그 긴 밭을 왔다 갔다 반복하면서 일하는 모습을 롱 숏으로 담았다. 웬만한 사진작가였다면 가까이 가서 일하는 사람의 표정을 담으려고 했을 것이다. 이한구의 ‘소소풍경’은 바람과 시간과 우주의 질서를 찾아가는 음유시인이 떠오른다. 그의 작업은 한없이 뜨겁고 끝없이 차가운 대기의 온도를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김지연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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