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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읽기

인류 최초의 문자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라스코 동굴 깊숙한 곳에 묘한 그림이 있다. 고대 이집트의 토트(지혜의 신)처럼 몸은 사람인데 머리는 새인 반인반수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림의 형식이다. 다른 벽화는 대상의 모습을 다소 상세하게 묘사했는데 이 그림은 몇 개의 선으로 단순하게 그려졌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가장 중요한 의미요소만 남은 상태랄까.


약 1만5000년 전 그려진 터라 이 그림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얼 그리고자 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올림픽의 픽토그램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아이콘처럼. 픽토그램과 아이콘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출신 사회학자 오토 노이라트에 의해 처음 시도됐다. 디자인 역사에서 이를 ‘아이소타입(Isotype)’이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노이라트는 글자를 모르는 노동자들에게 정보를 쉽고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아이소타입을 발명했다. 현재 픽토그램과 아이콘은 음악의 음표처럼 그래픽디자인의 문자로 여겨진다. 이 문자는 일종의 그림문자다.


엄밀하게 말하면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그림문자는 인류의 오랜 소통 방식이다. 비록 정교하게 그려졌지만 중세의 성화(聖畵) 이콘(icon)은 문자를 모르는 신도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그려졌다. 아이콘이란 말도 중세 이콘에서 비롯되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중국의 ‘상형문자’와 이집트의 ‘신성문자’, 수메르의 ‘쐐기문자’는 모두 그림이었다.


인류 최초의 문자인 수메르 ‘쐐기문자’는 대상의 특징을 단순화시킨 그림에 가깝다. 마치 라스코 동굴벽화에 등장하는 ‘새+인간’처럼 선 몇 개로 가장 중요한 의미요소만 남긴 상태다. 소리가 아닌 의미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를 ‘표의문자(表意文字)’라 한다. 즉 표의문자의 조건은 아주 단순화된 그림이다. 이 간단한 원리를 알면 단순한 그림들은 오랜 시간 표의문자 역할을 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나는 라스코 동굴 그림을 보고 흥분했다. “아! 인류 최초의 문자기록은 수메르의 진흙판이 아니라 라스코 동굴 벽에 새겨져 있었구나!”


<윤여경 디자인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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