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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

카럴 판 라러,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공연 장면. ⓒ박수환, 국립현대미술관


“당신이 두려워하는 미래를 보라.” ‘우리가 미래에 관해 기대하고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영국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의 등장인물 베서니는 몸을 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육체를 벗어나고 싶은 그는 부모에게, 뇌를 다운로드해 클라우드에 보내는 시스템을 설명했다. 그것이 자살을 뜻하는 게 아닌지 묻는 부모에게 “다시 돌아가지. 흙으로”라고 답변한 베서니는 데이터가 되어 삶과 죽음이 없는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고 했다. 부모는 그녀의 인터넷 사용을 금지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작가 카럴 판 라러가 퍼포머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선택한 것은 베서니가 벗어버리고 싶었던, 일종의 비어버린 육체였다. 무대 위에 함께 올라선 최면술사가 카럴의 의식 스위치를 꺼버리면, 최면에 빠진 그의 몸은 4명의 무용수에게 주어지고, 이들은 카럴의 신체를 조작하면서 약 30분간 움직임을 만든다. 그렇게 그의 몸은 타인에 의해 조종당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당장의 움직임을 자기 의지로 만들지는 못할지라도, 이 상황 전체를 기획한 것은 카럴 자신이니, 그는 자신의 신체를 잠재우는 대신 다른 퍼포머들의 신체를 지배한 셈이다. 무대 위에서 한순간도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방치되지 않는 그의 잠든 신체가, 공연 전체를 지배하고 다른 모든 움직임을 통제하는 상황을 보며, 육체의 무한한 정치성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베서니가 트랜스휴먼이 되어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육체였을 것임을, 그러나 ‘클라우드’로 들어간다 한들 그녀가 자기 의지에 충실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 새로운 세상 역시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을, 오늘도 바이러스로부터 빈틈없이 수호되는 육체를 살피며 생각해본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kimjiy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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